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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 10점
박민규 지음/예담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눈에 익은 그림인데 어딘가 낯섭니다. 당신의 책 표지에 걸린 이 그림은... 어린 공주도, 그림 속에 자화상도 아니고, 못생긴 시녀 한명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라는 고전풍의 제목과 잘 어울리면서 마음이 아련해지는게.. 게다가 장편소설이라니 당신의 예전 삼미슈퍼스타즈를 기억하고 있는 팬으로서 마음이 절로, 설레인건 저 뿐만이 아닐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펼친 첫 장. 사랑에 빠진 스무 살 커플의, 앞뒤 없는 애뜻한 이야기는 어쩐지 저를 당혹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스무살, 그리고 첫사랑이라. 이미 지나와버린 나이라서, 늘 꿈꿔왔지만 막상 스무 살이 되자 그 나이가 별게 아니라는 걸 이미 알아버린 나이라서, 제게 스무살의 첫사랑 이야기는 마치 드라마처럼 비현실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공감할 수 없었고... 심지어 허세스럽기까지 느껴졌다는... 솔직한 마음을 고백합니다. 그런 사랑은 일생일대의 로망이기 때문에, 스무살이 넘은 나에게는 앞으로 일어나길 바라는 꿈같은 일인데... 훗날 그런 일이 있을 거라고 확신은 차마 못하겠고... 이 둘은 누구길래 벌써 그런 사랑을 지금 하고 있다고, 알고 있다고.... 자랑질이냐, 싶었습니다. 이런 제 마음을 이해하시길 바랍니다.
 

블링블링 무비스타 아버지와 그의 곁에 있어서 더욱 남루한 색이 짙은 어머니. 그런 가정에서 당신은 외모에 대한 불신. 보이는 것 너머의 아름다움을 생각했습니다. 짧지 않은 당신의 과거 속에서 저는 그런 당신의 생각을 충분히 납득... 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어머니였기에, 사랑하는 사람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타고난 볼품없는 얼굴이 한 사람의 삶을 얼마나 피곤하게 하는지, 그 너머의 진실들을 가리는지 당신은 남보다 일찍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당신의 이야기는, 이 소설의 중심이 되는 당신의 사랑이야기보다 훨씬 중요...했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못생긴 여자를 사랑하는 이야기’ 속 주인공이기 때문에, 만약 당신이 미인에게 첫눈에 반하듯 운명적으로 못생긴 여자에게 꽂혔다...고 했다면, 얼마나 이 이야기는 시시했을까요. 당신이 왜 남들과 달리 못생긴 여자에게 호감을 느꼈는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쁜 여자를 사랑하기 마련인데 당신은 왜 그러지 않았는지, 저는 그 이유를 충분히 납득해야만 이 이야기에 매료될 수 있으니까요. 하여 저는 이 이야기에 매료될 수밖에 없었고, 이내 첫사랑에 빠지듯 당신의 사랑이야기에 설레기 시작했으며... 때론 안타까운 마음에 입술을 깨물기도 하고... 얼마 남지 않은 책장을 한 장 한 장 아쉽게 넘겨가며 읽었습니다. 네, 저는, 매료되고 말았습니다.


사실, 이야기 속에 사랑이야기는 딱히 별 사건은 없지만... 대신 당신과 그녀의 섬세한 내면의 소리... 그리고 변화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것들이 사랑이라고, 둘이서 한 특별한 일들, 에피소드, 추억보다도, 함께 있을 때의 설렘과 고민들, 기다림, 변화... 그것들이 사랑이 될 수 있다고 당신은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과 요한이 쏟아내는 사랑과 세상에 대한 말들이 군데군데 제 마음 깊숙이 다가와서, 저는 몇 번이고 밑줄을 긋고, 책장을 접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외모지상주의 풍조에 비롯, 이미지의 노예가 된 요즘의 풍조에 대해서 같이 개탄하고... 그러면서 내 자신 역시 ‘요즘의 것’과 다름없음을 반성하고... 돌아보게 되고... 특히나 사랑에 있어서 얼마나 이미지를 숭배해왔던가. 보이는 것에 목숨을 걸었던 일이 얼마나 헛된가. 그것을 처음으로 절절히 깨달았습니다. 이제껏 사회과학서적이나 자기계발서적 속에서 “외면의 것에 집착하지 말아라. 그 너머의 진실을 봐라. 이미지의 노예가 되지 말아라!”라는 명령을 들은 적은 많습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들이 이렇게 마음에 와 닿아... 내 삶과 직결되는 반성을 촉구하고... 왜 그러지 말아야 하는지, 이미지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구체적이고 또렷하게 가르쳐준 것은... 당신이 처음이었습니다. 당신과 나의 이야기였기 때문에... 이것이 소설이 가진, 문학이 가진 힘이 아니었을까요... 단순히 이야기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말과 이야기가 내 과거와 현재를 헤집으며 사랑과 외모(구체적으로 잘 생긴 것)에 대한 내 망상과 환상을 따끔히 꼬집어 주어... 저는 무척이나 개운하고 통쾌했습니다.

 
저는 늘 궁금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외롭다고... 그렇게 외치고 있는데도, 서로 보듬어줄 생각은 하지 않고, 상처를 내기 일쑤입니다. 반쪽의 가슴이 외로우면, 남은 반쪽에게 자신의 반쪽의 사랑을 부어, 하나를 이뤄내면 될 텐데... 그러니까 서로 사랑하면 되는데 왜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고 서로 외롭다고만 울부짖을까... 물론 그 사람들 속에는 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만... 저는 이 책에서 처음으로 그 힌트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여자든 남자든 그런 대부분의 인간들은 아직 전기가 들어오지 않은 전구와 같은 거야. 전기만 들어오면 누구라도 빛을 발하지, 그건 빛을 잃은 어떤 전구보다도 아름답고 눈부신 거야. 그게 사랑이지. 인간은 누구나 하나의 극을 가진 전선과 같은 거야. 서로가 서로를 만나 서로의 영혼에 불을 밝히는 거지. 누구나 사랑을 원하면서도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까닭은, 서로가 서로의 불 꺼진 모습만을 보고 있기 때문이야. 그래서 무시하는 거야. 불을 밝혔을 때의 서로를... 또 서로를 밝히는 것이 서로서로임을 모르기 때문이지.(...) 믿지 않기 때문이지. 기대하지 않고... 서로를 발견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야.

 

그녀에게 불을 켜준 당신의 마음은, 무척이나 설레고 아름다웠습니다. 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어떻게 생긴 사람이 어떤 사람을 사랑하느냐가 아니고... 그 사람이 어떤 마음을 누리고 있는가, 얼마만큼의 행복과 얼마만큼의 기쁨을 누리고 있는가에 달려있다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가을의 쌀쌀한 고궁도 봄날의 것보다 아름다울 것이고, 김치찌개 냄새가 나는 어둔 골목도 가로등 반짝이는 로맨틱한 길이 될 수 있다는 것.


저는,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을 떠난다는 말을 믿지 않습니다. 사랑한다면 어떤 경우에도 곁을 지켜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변명은 있는 척, 아는 척하는 드라마에서나 떠들어대는 핑계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떠난 것에 대해서만큼은, 조금 식상하단 느낌도 지울 수 없었지만... 공감했습니다. 대학이라는 새로운 공간으로 나아간 당신이 변해버릴 것에 대한 두려움. 떠날 것에 대한 두려움은,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는 것이었지요. 그런 그녀의 진심이 담긴 편지는 그간 그녀가 얼마나 어두운 시간을 살아왔는지. 그녀가 선택할 수 없었던 외모 때문에, 고작 그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상처를 안고 살아왔는지 들으며 마음이 아팠습니다. 당신도 그랬겠지요. 그랬기에 그녀가 처음으로 그렇게 어렵게 꺼낸 그 말, “사랑합니다.”가 그렇게 큰 울림으로 다가왔던 것이겠지요.

 
외람된 말씀이지만, 저는 이 이야기가 거기까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이후에, 그와 그녀가 만나지 못하고 멀리 서로를 그리워하는 이야기는 물론 애뜻하고 아련하지만, 그녀가 과거에 받았을 고통을 회상하고, 마음 아파하는 당신의 말들은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급기야 새로운 여자친구가 생겼는데도 불구, 얼굴이 이쁘다는 이유만으로 반감을 갖았다는 이야기는, 게다가 이쁜 여자친구가 속물에다 진지하지 않는다는 통념을 그대로 반영한 것은, 뭐랄까. 못생긴 여자는 이렇다,는 이야기와 별반 다를 게 없는 편견이 아닐런지요. 물론 거기서 예쁘고 현명한 여자를 만나 행복하게 살았다고 전개되는 것도 황당하겠지만... 한쪽으로만 기운 목소리가 끊임없이 같은 것을 비판하고, 같은 것을 슬퍼하는 부분은 조금 지루하게 느껴졌습니다. 당신의 목소리가 이제 요한의 목소리가 되어, 세상물정비판 2부를 쏟아내고 있었거든요. 뒤로 갈수록 말투는 거세지고, 반감은 더욱 단단해져서.

 
그리고 난데없는 해피엔딩은, 이제껏 오래오래 끌어왔던 마음들이 와르르 균형을 잃고 쏟아지는 듯이... 아쉬웠다는 솔직한 소감도 덧붙입니다. 물론 그것이 왜 그렇게 난데없고 급작스러웠는지에 대해 뒷부분에서 다시 이야기하고 있지만. 반전과도 같은 writer's cut... 아직 읽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굳이 언급하고 싶지 않지만, 저는 그 부분을 읽고 한참 공허한 기분을 가졌던 기억이 납니다. 참 좋았는데, 그런 세 사람의 우정이, 사랑이. 현실적인 결말과 아름다운 추억도 맘에 들었는데. 그 공허함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결말은, 참, 아름다웠는데 말입니다. 사랑은 과연 무엇일까요? 아름다운 추억으로서 빛나는 것일까요? 지나야만 그 반짝거림을 알 수 있는, 스무살 같은 것일까요? 사랑은 아니, 아니에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왜 우리는, 익히지 않아도 잘 살수도 있는 함수와 인수분해, 지수와 로그는 배우면서, 익히지 않으면 잘 모르는, 사랑하는 법, 이해하는 법 같은 건 배우지 않는 걸까요? 누구나 사랑을 하고 싶고, 해야만 하는 데도 사랑에 대해 알고 깨닫고 더 잘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에는 그렇게 소홀히 하는 것일까요? 왜 사람들은 인생의 우선순위를 스스로 선택하지 않고, 남들이 하는 순위에 맞춰 정하는 걸까요? 그렇게 외로워하면서... 그렇게 고독해하면서 말입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저는 결국 그 모든 이유가 저에게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고, 저부터가 제 마음 앞에 걸쳐진 화려한 장막을 걷어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물론 결코 쉬운 일은 아니겠지요. 마치 늘 마시던 커피의 종류를 바꾸듯, 잘 먹던 아이스크림의 종류를 바꾸듯, 그렇게 쉽게 될 일도 아니겠지요. 하지만... 이 이야기를 들은 이상, 사랑을 하는 데에 있어, 생활이 아닌 ‘삶’을 사는데 있어 무엇이 더 중요한지 들은 이상... 저는 적어도 그 이전과 같은 사람은 이제... 아니겠지요. 그래서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사랑합시다.

 



Posted by 프로듀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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