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기의 ‘멋진하루’를 보고 나서, 문득 원작이 궁금해졌다. 옛 연인에게 빚을 갚으라고 찾아간 여자. 그리고 그 둘이 돈을 받으러 다니는 하루-라는 스토리가 참신하긴 했지만, 돈을 받으러 가는 과정이 조금 반복적이어서 영화는 긴장감이 떨어진 게 사실이다. 과연 그런 부분은 어떻게 표현되었고, 게다가 이 장편 영화의 원작은 단편이라고 해서 그녀의 책을 찾게 되었다.




책은 줄거리 위주로, 영화와 상당히 흡사했다. 영화에서 하정우가 그랬듯 작품 속에서도 도모로의 캐릭터는 무척이나 독특했다. 이것 참 사람이 좋은 걸까, 뭔가 모자란 걸까 싶은 도모로. 그를 둘러싼 알 수 없는 여성들. 반면에 그에게 순순히 돈을 내어주는 여성들. 그들을 보면서 유키에는 자신이 사귀었던 이 남자 도모로에 대해 다시 생각하기 시작한다. 내가 정말 이 남자를 알았던 것일까, 싶을 정도로.

 

이 작품의 미덕은 단순히 이 알 수 없는 남자의 캐릭터만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유키에가 보기에는 참 딱해 보이는, 저기서 돈 빌리고 여기 빚을 겨우 막는 도모로의 캐릭터와 삶을 이해할만한 여지를 준다는 것이다. 그에게 선뜻 돈을 빌려주는 여자들의 말에서. 도모로는 그런 사람이라고. 소유의 욕심이 없고, 넉넉할 때 나누고 없을 때 빌리는 것이 어렵지 않은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유키에가 새로 알듯이 관객도 도모로를 다시 알게 된다.


 



다이라 아스코는 독특한 감수성을 지닌 작가다.
이윤기의 최근 작품도 그녀의 단편을 또 한번 원작 삼아 진행되었다고 했다. 실제로 나머지 작품도 이 특유의 감수성이 넘쳐 흘렀다. 루저라서, 또 다른 루저를 위로하는데 머뭇거리는 사람들. 때로는 같은 처지이면서, 나는 아니겠지 자위하는 루저들. 그들 사이에는 묘한 동지감이 흐르고, 그들의 삶 자체가 서로에게 위로를 주는 형국이다. 이것이 변주된 여섯 개의 단편이 모아져 있는데, 묘한 매력이 있다.

 

특히 <멋진 하루>처럼 낯선 만남을 그려내는 데 익숙한 작가다.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낯선 처자에게 임종이 가까운 아버지의 딸 대역을 부탁하는 이야기 <애드리브 나이트>, 시어머니가 멋있어서 그 가족이 되고 싶어서 그의 아들과 결혼한 쓰키에. 그녀와 남편의 쿨하다못해 무심한 관계가 인상적이던 <해바라기 마트의 가구야 공주>, 학창시절 첫사랑을 만났지만, 무수한 성형수술로 자신을 못알아보는 그 앞에서 쿨한 척 깔깔대는 루이 이야기 <맛있는 물이 숨겨진 곳> 등 만남이 사건의 중요한 계기가 되곤 한다.

 

뿐만 아니라 <누군가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한 직장부하가 상사에게 고민 상담을 하면서 시작된다. 소노베를 임신시켜서 돈을 쥐어줬다. 참담하게 말하는 직장부하를 위로하는 도모아키. 하지만 그 역시 소노베에게 같은 식으로 돈을 준 상태다. 그런데 순진한 후배 겐타가 그녀를 사랑한다고 도모야키를 찾아왔다. 두 사람을 말리기로 작정한 도모야키.


이 이야기도 처음엔 이상한 사람같기만 한 소노베를 도모야키가 이해하게 되는 순간- 소노베를 찾아가 겐타는 안된다고 말하자, 소노베는 ‘자신도 두렵다며, 자기도 결코 쉬운 여자이고 쉽지 않다는’ 속 마음을 밝히는 순간- 소노베가 다른 사람처럼 보이는 순간이 독자의 감수성을 자극한다. 게다가 그녀를 쉽게 버리는 두 남자와 대조되어, 순정 100%로 등장하는 겐타의 사랑 역시 훈훈함을 더한다. 이 작품은 플롯이 좋다.


(맨 위의 사진과 비교해보면, 작가가 인물을 어떤 식으로 그리고,
어떤 이야기를 다루는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위로하는 이야기. 참 많지만, 일본 소설에서 만나게 되는 이러한 설정은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이 작품에 한정해서 분석해보자면, 등장인물들은 대게 루저라고 불릴 법한 직업-전화방, 마담 등-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도덕적인 신념만큼은 확고해서, 가끔 독자로서는 손발이 오그라드는 계몽적 대사를 외치지만, 종종 그것은 상대방 캐릭터를 감화시키는 기능을 한다. 이것은 단순히 위로의 말이 아니라 자신들의 신념을 외치는 것이기 때문에 분명 마음을 움직이는 구석이 있다. 좋은 직업군에 속한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루저다. 다들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지만-<온니유>의 나카하라- 오히려 자신보다 못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에게 결국 위로를 받는다. 때문에 심리 위주의 서술이 주를 이룬다. 그 점이 독자로 하여금 읽기 쉬우면서 캐릭터에 가깝게 다가가는 효과를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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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을 잃은 여자, 신애는 아들과 함께 남편의 고향 밀양으로 내려온다. 신애의 과거는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자신을 모르는 곳에서 새로운 출발을 하고 싶다는 그녀를 보니 이전의 시간이 그녀에게 결코 녹록치 않은 모양이다. 허나 새로운 곳에서의 시간도 그녀는 버겁기만 하다. 이방인인 그녀를 둘러싼 소문이 그녀보다도 먼저 사람들에게 도착해 그녀는 졸지에 ‘불행한 여자’가 된다. 숨바꼭질을 좋아하는 아이는 갑작스럽게 납치되어 영영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어버렸다. 밀양이 시작되는 곳에서 만난 종찬. 그는 그녀의 시크릿 선샤인처럼, 그때부터 내내 그녀의 주변을 맴돈다.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신애가 어떤 과거를 지녔는지, 아이가 어쩌다 불의의 사고를 당했는지 이 영화는 관심이 없다. 그녀를 둘러싼 사건들은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다. 화면에 보이는 것은 오롯이 자그마한 신애의 몸뿐이다. 우리는 그녀의 반응을 통해서만 사건을 느끼고 알 수 있다. 이 영화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견딜 수 없는 고통에 빠진 그녀가, 이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영화는 불편하다. 관객으로서, 신애한테 감정이입 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신애는 낯선 캐릭터다. 이것은 감독의 계산이다. 이창동은 관객이 그녀를 “주관적으로 이입되는 것보다 한발 물러서서 보도록” 했다. 컷과 컷 사이에 그녀는 자세한 설명이 없이도 극단적인 감정을 오가는 여자다. 그녀는 자존심이 강하고, 생활력도 강하고, 무엇보다 의지가 강한 인물이다. 때문에 다른 여자와의 관계가 있던 남편이 자신만을 사랑했다고 굳게 믿을 수 있으며, 고통 가운데 단번에 종교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 그러하기 때문에, 자신의 믿음이 흔들렸을 때 철저하게 절규하고, 저항한다. 누구도 그녀 곁에 다가설 수 없다. 누구도 함부러 그녀의 고통을 이해하거나 위로할 수 없게 만든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위로하고 기도하고 가까이 다다가지만, 실제로 그녀의 가장 가까이 있는 인물은 매번 그녀의 몇 걸음 뒤에 머물러 있는 종찬이다.

 

두 번째 불편했던 영화는, 종교적인 부분이다. 기독교의 풍경이 그려지는 모습에 의구심을 품었다.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감독은 이런 풍경으로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 이창동 감독은 스스로 말하듯이 종교에, 혹은 타인에게 예의가 있는 사람이라고 느꼈다. 신애를 묘사하는 방식이나 교회 풍경의 묘사에 있어서 고민한 흔적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감독 코멘터리를 참고하시길) 적어도 대상을 두고 함부로 아는 척 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철저히 신애의 신체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어찌보면 자극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기독교 설정은 사실 하나의 배경에 그친다. 그것은 그저 위로하는 사람들의 풍경인데, 종교가 건네는 위로는 일반인이 건네는 그것보다 훨씬 적극적이다. 때때로 우리가 너무도 쉽게 건네는 위로의 풍경- 너를 이해한다고 쉽게 단정짓는 풍경을 극대화시킨 것을 기독교적인 설정으로 표현했다고 본다. 위로하려는 노력보다 앞서는 말은 때때로 소외를 낳는다. 신애 근처의 많은 사람들이 모두 신애를 위하지만, 신애는 늘 소외되어 있다. 신애 스스로도 자신의 내면과 화해하지 못하고, 애써 웃음을 지으며 스스로를 소외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감독은 그녀의 감정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극단에 치달은 그녀의 모습은 사뭇 공포영화를 보는 것만큼이나 무섭고 충격적이다. 하늘(신)에 저항하는 그녀의 작은 몸뚱아리는, 인간 존재의 한계에 부딪쳐 안간힘을 쓴다. 누구도 그녀의 고통에서 예외일 수 없고, 누구도 그녀를 위로하는 실체없는 손과 다름 아니다. 그러기에 관객은 주체이자 객체가 되고, 어느새 밀양이라는 세계 속 하나의 조연이 되어 그녀를 바라보는 듯한 몰입을 하게 된다.

 

내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겨우 용서를 베풀러갔더니, 그 죄인은 벌써 구원을 받고 평화 속에 놓여있다. 이 어처구니 없는 용서(그녀)와 용서(신)의 간극. 하늘과 땅의 거리만큼 벌어진 망망한 간극 속에 홀로 놓여진 작은 영혼. 그녀는 바람처럼, 때때로 작은 회오리처럼 흔들린다. 관객은 그런 그녀를 계속 본다. 우리는 타인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우리가 그녀의 고통을 지켜보는 것은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가? 감독은 왜 그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의 한 가운데로 관객을 몰아넣는가?

 



영화는 끝이 나도, 그녀의 삶은 그렇게 계속 될 것이다. 그녀는 때때로 눈을 치켜뜨며 하늘을 올려다 볼지도 모른다. 종찬은 계속 그렇게 머물기만 할지도 모른다. 영화는 끝날 때까지 그녀의 삶에 어떠한 변화도 구원도 주지 않는다. 하지만, 희망이라고 하기엔 무척이나 미미하지만, 그녀가 마지막 장면에서 웃는다. 양복가게 주인여자와 평상시처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앞에서도 충분히 나누던 일상적으로 나누는 안부임에도 불구,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 나는 주인여자가 그녀에게 “병원에서 잘 먹고 잘 쉬었나베”하며 툭 말을 꺼냈다 얼른 살짝 ‘아차 잘못말했다’하며 고개를 돌려 입을 가리는 장면. 그 모습을 보고 터덜 웃음을 터뜨리는 신애.

 




함께 웃는 두 사람 장면에서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살아갈 수 있겠다. 타인의 고통에 섣부른 위로가 아니라, 작은, 아주 작은- 입을 가리고 실수를 용인하는 정도라도- 배려가 있다면, 당신과 나는 함께 웃을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은 결코 아픔을 치유해주지는 못하지만, 그 아픔도 삶의 한 조각처럼, 내리쬐는 햇볕처럼 그대로 품고, 한번 웃어주고 우리는 그렇게 계속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너를 이해할 수 있다는 만용, 덜 불행한 내가 더 불행한 너를 위로해주겠다는 무의식적인 만용에 한번만이라도 의심을 품을 수 있다면, 한번만이라도 그것이 상대를 소외시킬 수 있다고 배려할 수 있다면, 적어도 우리는 이렇게 함께 살아갈 수 있는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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