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폴더를 정리하다가 <시선1318>을 발견했다.
딱히 영화를 볼 생각은 아니었지만, 최근 윤성호 감독님의 작품에 꽂혀있던 터라,
<시선 1318> 속에 포함된 윤성호 단편 "청소년 드라마의 이해와 실제"를 보고 싶어서 영화를 보았다.
일단 "청소년의 이해와 실제"는, 윤성호식 화법이 도드라진 발랄 그 자체의 작품이다.
하나의 스토리가 있기 보다는, 한 장소에서 여러명의 고딩들의 목소리를 통해 "고딩들의 현재"를 고스란히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고딩을 겨냥했기 보다는 고딩, 그 이후의 삶을 주목한다. 그들은 과연 어떠한 삶을 꿈꾸고, 그들이 보는 내일은 어떤 것인가 묻는다. 때문에 88만원 세대에게 직격탄을 날리는 대사들은 보는 대딩의 마음을 후벼판다고나 할까.
너무 발랄하고 통통튀는 윤성호식 자막과 편집 스타일에다가 전체적인 빠른 리듬 때문에 온전히 이야기를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 흐름과 스타일만으로도 무척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시종일관 흐르는 비트박스. <은하해방전선> 남감독을 떠올리게 할 정도의 녹슬지 않은 말빨! 별난 감수성, 짧은 이야기 속에서도 윤성호 이름 세글자를 쿵, 박아놓는다.
엄마, 내 우주는 끙끙 앓아요. 매일 발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우주가 너에게 준 숙제는 어떻게 했니?
아니요, 내가 바로 우주 인걸요.
시장이 너에게 줄 선물은 알고는 있니?
아니요, 내가 바로 선물 인걸요.
미래가 준비된 인생을 살고싶잖니?
아니요. 지금이 바로 인생인걸요.
새로운 언어가 너희를 자유케 할거야.
아니요. 내가 바로 언어인걸요.
우주가 너에게 준 숙제는 어떻게 했니?
아니요, 내가 바로 우주 인걸요.
시장이 너에게 줄 선물은 알고는 있니?
아니요, 내가 바로 선물 인걸요.
미래가 준비된 인생을 살고싶잖니?
아니요. 지금이 바로 인생인걸요.
새로운 언어가 너희를 자유케 할거야.
아니요. 내가 바로 언어인걸요.
그 다음 영화를 이어서 본 까닭은 감독이 김태용이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 때문에 굳이 영화평을 쓴다.
단편 "달리는 차은"은 정말 양 엄지 손가락을 번쩍 세울 만큼 멋진 작품이었다.
우연히 건진 수작!!! 주저없이 별 다섯개. ★★★★★
역시 김태용 감독! 이라고 울부짖을 만큼 ㅋㅋ 좋은 작품이었다.
누군가는 가족의 탄생 후속편이라고 할 정도로, 따뜻한, 하지만 저릿한 대안가족 이야기다.
달리는 육상부 소녀 차은이의 새엄마는 필리핀 여성이다. 새만금 간척사업이 열리고 있는 해변도시. 육상부는 해체되고 차은이가 속한 육상부는 해체된다. 더이상 달릴 수 없는 차은. 차은의 꿈따윈 관심없는 완고한 아버지. 친해지고 싶지 않은 엄마. 게다가 학교에 차은의 엄마가 필리핀 여성이라는 것이 소문나서 차은에게 상처를 준다. 계속 달리는 차은이. 차은의 달리기 속에 아이의 고민, 슬픔, 상처, 기쁨, 사랑 등이 한꺼번에 묻어나온다.
대사도 좋고, 연기도 좋지만 가장 좋은 것은, 그녀를 포착해내는 감독의 따뜻한 연출이었다. 담아내는 시선이 무엇보다 좋았다. 그 때문에 자칫 뻔해질 수 있는 이야기가 감수성 덩어리로 만들어 질 수 있었던 비결이다.
실제 육상 선수라는 차은, 전수영양과 그녀의 가족 식구들은 모두 일반인이라고 한다. 하지만 정말 놀랄만큼 좋은 연기를 펼친다. 차은과 남자친구. 그리고 가족. 진심같지 않게 멀어지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따뜻한 시선.
놀랍게도, 영화는 차마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보여준다. 차마 말할 수 없었던, 차마 보여줄 수 없었던 소녀의 진심, 그 나이때에는 누구나 그랬듯이, 혼자 앓는 답답한 마음. 내 앞에 놓인 세상에 대한 불신과 막막함. 내가 나 스스로를 지킬 수 없다는 두려움. 나를 둘러싼 사람들이 나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절망. 십대에 가질 수 있는 '말할 수 없는 수많은 불안'들이 그의 영화에 절절히 묻어나온다. 우리는 누구나 한때, (육상부가 아니더라도) 차은처럼 달렸을 것이다. 무작정. 언젠가 그렇게 숨이 가빠 켁켁대다가도 훌쩍훌쩍 울기도 했을거다. 마치 오래 전 일기장을 보는 것처럼 아련함. 그리움. 반가움.
" 너 나 좋아하지? .. 좋아하면 그러는 거 아냐."
김태용 감독은 이 대사를 써놓고 40대 감성이라는 야유를 받았다고 하지만,
이 늦은 밤, 나의 마음을 절절히 울리는 이 대사는 기필코 최고다 T-T
이 대사를 칠 때의 차은의 표정과, 그 달빛과, 골목과, 영찬의 표정이라니...
정말 강추다. (바이런 양은 반드시 관람할 것을 추천하는 바다! 접속해ㅋㅋ)
이런 영화라니... 김태용 감독의 다음 작품을 기다리지 않을 수가 없다!! 차은의 그렁한 눈망울,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언제나 '인권'영화는 (인권영화이기때문에 더욱) 계몽성을 띄는 순간, 진부함이 바이러스처럼 퍼지는 것 같다. 인권영화는 충분히 감성넘칠 수 있고('달리는 차은'), 재기발랄할 수 있다('청소년 드라마...')는 것을 하나의 가능성으로 보여준 것이 <1318>프로젝트의 의의라면, 나머지 작품들은 (인권)영화와 계몽성의 관계를 다시금 되새기게끔 했다. 뮤지컬 형식으로 일등과 꼴지의 문제를 다룬 방은진 감독의 '진주는 공부중'도 형식이 재미있었지만 뭐랄까. 문제의식이 새롭지 않았고, 화해가 너무 쉬웠다. 나머지 작품이 아쉬웠던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점에서 인상깊었던 작품이 이현승 감독의 '릴레이'다. 아이가 있는 고등학생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하는 진지한 고민을 코미디로 풀어낸 '릴레이'도 좋은 작품이었다. 갈등의 구조 및 결말이 단순하긴 했지만, 그 문제 의식만큼은 한번쯤 고민할 만한 이야기였다. 게다가 얼마나 사회적 지원이 시급한지 큰 목소리를 낸다. 왜 미혼모는 있는데 미혼부는 없죠? 당찬 박보영의 연기도 좋다. (하지만 역시, 미혼모 여고생은 영화 속에서도 쓸쓸히 혼자 돌아갈 뿐이다.)
예전 인권영화를 찍어야겠다고 마음 먹었을 때, 가장 어려운 문제가 바로 이 '계몽성에서 오는 진부함'을 어떻게 피할 것인가였다. 계몽적인 메시지만 던져도 (놀랍게도) 활어같은 이야기가 금세 꼬리를 늘어뜨리고 회가 되는 것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이 프로젝트 역시 이 벽을 완전히 뛰어넘지는 못했지만, ( 절반은 거뜬히 넘었다!ㄷㄷ) '현재의 고등학생의 모습'을 재현하는데 주력했다는 점은 놀랄 만한 성과임이 분명하다.
인권영화가 관객에게 어떻게 접근해야 할 것인가?
<시선 1318>을 보니, '지금의 이야기'를 꺼내놓는 게 유효하다는 것을 알았다. 단, 여기저기서 너무 이야기 된 사연들 말고, 미처 살펴보지 못한 마음, 미처 전하지 못한 마음, 미처 헤아려주지 못했던 마음들을 꺼내놓아야 인권 영화로 진정성을 갖는다. 그것에 대한 진지한 고민도 담고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영화가 가진 이야기를 다루는 태도다. 그 이야기에 대해 영화는 왈가왈부할 것이 아니라, 그저 묵묵히 보여주기만 해도 된다. 섣부른 위로나 조언보다는 이야기 자체에 귀기울이고,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느끼는지만 정확히 보여줘도 충분히 관객에게는 감동으로 다가온다. 그것이 어쩌면 '관심'이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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