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 집으로 돌아가는 늦은 밤.

비가 내려 젖어있는 도로를 걸으며, 진한 공기들을 가르며 나는 그만 또 생각 속으로 함몰되어 버렸다.

여기를 걷고 있지만, 나는 여기 없는 상태.

그럼 거긴 어디?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온 400여자의 단어들, 문장들이 내 머릿속을 휘몰아쳤다. 수도 없이 되뇌고 상상하고, 그 단어를 타고 나는, 내맘은 온통 꿀벌처럼 붕붕.

하지만 결코 가볍지도, 개운하지도 않은, 자꾸만 부정하고 싶어지는, 좋지만 좋지만도 않은, 기쁘지만 기쁘지만도 않은.

행복. 하지만, 행복. 하지만 행복. 하지만 이게 행복이면 안될것 같은.

 

 

길을 가다가 시를 쓰고 싶어졌다.

찬란하게 유치해서 반짝반짝 빛나는, 사랑의 언어들!

닿지 않는 편지처럼 자조적으로 읊는 시어들. 역시 진짜가 아니라 그런지 자꾸만 모방하게 되는 관습적인 말들.

 

 

이름, 머금기만 해도 깊은 한숨

메신저 대화창 같은 머릿속은 온종일 덜컹덜컹컹컹컹

네가 입력한 부호를 복사하고 복사하고

결국 암호가 되어버린 말들

머리칼 끄트머리까지, 손톱 끄트머리까지

단숨에 바싹, 까맣게 재로 바스라진다

얼굴도 목소리도 지워진 이 xxxxxxxxxx

네가 이땅에 없어서 다행이다

내 말을 들을 수도 거절할 수도 없어서 다행이다

올겨울, 신종플루보다 더무서운 것이 바다를 건너왔다

 

돌산으로 꽁꽁 감춰둔, 거대한 빙하로 단단히 얼려둔 용암,

천 일만에 다시 부글부글 화산

그 안에 세 글자, 담가버리고 싶다

한 손이 뭉개지더라도, 질식시켜 푹 담가버리고 싶다

 

 

앞으로 또 천일 후에, 지금의 이 병적인 열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이 글을 분석해봐야겠다.

지금은 분출하는 수밖에 없다. 담가버리는 수밖에 없다

Posted by 프로듀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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