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의 원작은 세 권짜리 소설이다. 일찌감치 책을 읽고 영화개봉을 기다렸던 나는, 이 이야기를 제대로 담기 위해서라면, 11시간짜리 드라마는 아니더라도 4시간짜리 러닝타임정도는 확보해야 하는 게 아닐까 상상했었다. 그만큼 등장인물도 많고 사건도 많을뿐더러 이 모든 이야기와 인물들이 한 방향을 향해 가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원작보다 나은 개작은 없다고. 이제까지 영화경험을 살려봤을 때 대부분의 작품은 그러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원작’이라는 것 자체가 소설로 쓸 수밖에 없어서 소설로 씌여진 이야기이고, 영화로 찍을 수 밖에 없어서 영화로 찍힌 이야기가 아닌가. 다른 매체로의 이동은 처음부터 그대로 담아낼 수 없는 한계를 지닌 것이다. 그러므로, 원작 <백야행>에 홀린 나는 영화 개봉일을 손꼽아 기다리면서도, 내심 기대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라고는하지만, 결국 매일매일 기대하며 기다린 셈이 되었다.)

 

 

영화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이렇게 가슴속에서 긴장감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온 적은 처음이었다. 이 문장을 정확히 해석하자면, 첫 장면이 보이자마자 내 머리 속에 늘 흐르던 <백야행> 이야기가 맞물려가면서 나는 처음을 보면서도 처음-중간-끝을 상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머릿속에는 장면장면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강렬한 서술이 한문장 한문장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물론 영화는 첫 장면부터 강렬한 이미지로 시작한다. 살인 장면과 러브신장면을 점차 높아져가는 클래식 선율에 맞추어 긴장감을 한껏 끌어올린다. 소설에서는 요한과 미호의 이야기가 거의 평행을 이루며 서술된다. 독자는 스스로 교접점을 찾아가며 군데군데 안타까움 혹은 놀라움의 탄성을 자아내는 재미가 있다. 이러한 구성은 밝은 하늘 아래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하는 두 사람의 사랑의 안타까움을 고조시킨다.


이에 반해서 영화는 요한과 미호의 개별적인 이야기는 줄이고, 서로 떨어져있는 두 사람이 만나고 연결되는 접점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꾸려 나간다. 그러므로 영화 속에서는 초반부터 두 사람이 어떤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관객은 알 게 된다. 자꾸만 연결되는 생활의 동선과 삶의 영역을 통해 화려한 태양 같은 미호의 삶과 어두운 그늘 속의 요한의 삶이 더욱 대비된다. 영화는 현명하게도 소설 속 다른 매력적인 이야기 거리를 과감하게 삭제하고 두 사람의 사랑과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하여 영화는 소설 속 수많은 사건이 미세한 흔적만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에도 집중력을 잃지 않고 끝을 향해 우직하게 나아간다.

 



박연선 작가의 대사는 역시나 만족스러웠다. 소설 속에서 형사가 왜 그토록 14년 전 사건에 집착하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나오지는 않는데, 영화 속에서는 아들의 죽음을 결부시켜 당위성을 장치해 두었다. 또 소설 속 중요한 명대사들을 곳곳에 배치해두어 영화 곳곳에서 소설 속에서 느꼈던 문장의 맛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TV프로그램을 ‘동물의 왕국’으로 바꾸어 원숭이와 새끼 일화로 비유를 하는 등 세세한 디테일적인 부분도 자연스럽게 처리되었다. 또 마지막 옥상에서의 대치 장면은 소설 속에 없던 장면인데도 불구 형사와 요한의 울부짖음이 무척이나 극적으로 다가왔다.

“미안하다. 더 일찍 잡아주지 못해서......”

"그거 아세요? 태양이 높이 뜨면, 그림자는 사라지는 거에요"


  

 

밝음과 어둠- 빛의 대비인 만큼 스크린 속에서 만나는 요한과 미호의 모습은 소설 속 그것보다 훨씬 강렬하다. 다만, 각 캐릭터가 품고 있는 고유의 분위기를 살리는 데에는 조금 미흡했다. 물론 소설 페이지와 러닝타임의 차이겠지만, 소설 속에서는 여러 사건들을 통해 설득력있게 획득되는 요한과 미호의 독특한 분위기와 신비로움이 영화 속에서는 평면적으로 드러났다. 소설을 읽지 않은 사람이라면, “끝까지 지켜줄게!”라며 끊임없이 살인을 저지르는 요한과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라며 냉혹하게 죽음을 사주(使嗾)하는 미호라는 인물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까, 의문이 조금 들기도 했다.

 

오히려 영화에서 요한은 조금 더 순정적인 남자로 느껴졌다. 소설 속에서도 그는 헌신적이었지만 천재적인 지능이 돋보이는 냉혹한 남자로 느껴졌는데 극 중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고수의 모습은 조금 더 여린, (어른보다는) 청년의 느낌이 들었다. 오히려 미호가 소설 속보다 더 단단하게 그려졌다. 늘 비밀스러운 미소를 띠고는 있지만, 군데군데에서 인상을 쓰고, 이를 악무는 모습이 무척이나 자연스럽고 인상적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이 직접 만나거나 통화를 하거나 눈빛을 교환하는 것, 혹은 그저 스쳐지나갈 지라도 곁에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관객으로서 큰 쾌감이 아닐 수 없었다. 소설 <백야행>에서 단 한 번도 두 사람의 만남이나 접촉(사랑)을 볼 수 없어서 얼마나 아쉬웠던가. 비록 행복한 장면은 드물었지만, 늘 주변을 맴돌고 지켜주고 있는 요한의 존재를 직접 보는 것만으로도 강렬한 애틋함이 있었다. 그래서일까. 소설을 읽을 땐, 마지막 장면에서의 미호가 내내 마음을 떠나지 않았는데, 영화 속에서는 요한의 마지막 미소가 기억에 남는다.

 

그 미소를 떠올리니, 다시 한번 요한이 보고싶어진다.

 

 


Posted by 프로듀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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