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가 바뀌면 삶의 방식도 달라진다.
지난 일주일, 나는 여의도에 세 번 들렀다. 세 번 모두 다른 존재와 목적을 가진채 같은 길을 걸었다.
나는 국회의사당 1번 출구에서 세 번 내렸는데, 세 번 모두 같은 출구로 올라오면서, '이 출구로 나오기는 처음'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물론 목적지는 달랐을지언정, 나는 세 번 모두 같은 길을 걸은 셈인데, 세 번 모두 처음 걷는 길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이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세 번에 두번은 길을 헤맸고, 심지어 120에 전화를 걸어 길을 물어보기까지 했다.
점심을 십분 만에 해치우고 올라온 나는, 시간이 남아 근처 지역 탐방을 시도했다. 그래봤자 근처에 어떤 커피숍들이 있고, 던킨도너츠는 어디쯤에 포진해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한 탐색이었다. (맙소사, 나는 또 헤맸다. 어렸을 적부터 나의 가장 자랑스러운 점이 바로 낯선 길에서도 결코 헤매는 법이 없는 인간 네비게이션이라는 것인데!!!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나는 끝없이 사거리에 또 사거리가 붙어있고, 그 길 끝에 또다시 사거리로 이어지는 이해할 수 없는 건물들의 숲에 갇혀 더욱 당황하며 헤매고 있었다.
평소같으면 절대 들를 일이 없는 사무용품점에 들어갔다. 다른 존재재가 되었으므로 어쩐지 들어가면 뭔가 필요할 게 생길 것 같았다.
문방구용품을 기대하며 들어간 곳이었는데 그곳에는 기대 이상의 많은 물건들이 있었다. 깔고 앉으면 구름에 뜬 듯 폭신폭신 엉덩이를 감싸줄 것만 같은 방석, 맥심 커피로는 채워지지 않을 나의 드링킹 욕구를 해소해줄 수 있는 각종 티백, 서랍에 넣어 놓고 배고플때마다 하나씩 꺼내먹기 좋도록 작게 포장되어 있는 초콜릿, 진짜 당장 필요한 머그컵 등등등. 그곳에 전시된 모든 것이 여의도에서 밥벌이 하는 사무원들에게 꼬옥 필요한 모든 것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대체 사무용품점에서 왜 이따위 불량품같은 것을 팔고 있는게냐고 콧방귀를 뀌었겠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모든 상품이 가격 태그를 달고 있듯 자신의 당당한 용도를 내보이며 나를 유혹하고 있었다. 어메이징.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존재의 변화조차 내가 소비하는 것에서 느낄 수가 있구나.
지금 내 책상위에는 엄지손가락 크기로 포장된 가나 초콜릿과 꿀유자자 시럽이 놓여있다. 자애로우신 분들이 하나씩 선사해주신 것. 이것 역시 무적의 사무용품점에서 공수된 것이리라. 예전에 사무용품점은 크리스마스 카드 도구를 살때나 가끔 스케치북 같이 시간 때우는 놀이용품을 사러가는 곳이었는데, 이제 생필품을 사러 가는 곳이 되었다. 음, 흥미로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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