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더>가 어땠느냐는
물음에 나는 연신 “무서웠다”만 연발하고 있다. 엄마 얘기를 보고 무서웠다니. 엽기적인, 괴상한 캐릭터도 아닌, 국민엄마위상을 지닌 배우 김혜자를 보고 무서웠다니, 사뭇 의아할 수도 있겠다. 그 무서움(‘무서움’이 두려움보다 원초적이고도 감각적인 표현인 듯 하다.)은 박찬욱 영화를 볼 때의 무서움과 또 다르다.  

<살인의 추억>과 <올드보이>의 두려움이 다른 지점에 있는 것처럼. 박찬욱의 <박쥐>를 보는 내내, 감독이 지닌 악동적 에너지가 분출되는 것을 느꼈다. <마더>의 에너지는 심연 속으로 깊숙히 파고든다. 현실 속에서 운없이 마주칠법한 장면들이 주는 불쾌함. 미심쩍음이 봉준호가 만들어내는 두려움의 원천이다. 괴물보다 뱀파이어보다 더 무서운 것은,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이니까. 
 




모자란 아들 도준. 아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며 돌보는 엄마 혜자. 어느날 도준이 살인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간다. 도준과의 관계에서는 모든 것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엄마이지만, 사회 속에서 엄마는 그저 힘없고 약한 여자일 뿐이다. 약자의 위기는 누구도 관심 갖지 않는다. 결국, 혜자는 스스로 범인을 찾아나선다.

혜자는 도준에게 그저 헌신적인 존재다. 영화는 일상적으로 갖고 있는 ‘엄마’의 모습에서부터 출발한다. 도준이 노상방뇨를 하는 모습까지 지켜보는 혜자는, 도준의 모든 것을 끌어안고자 한다. 
 


혹자는 이 모든 이야기가 아들의 복수라고도 한다. 모든 것이 도준의 시나리오라는 것이다. 오싹한 얘기지만, 캐릭터를 보았을 때, 도준이 그토록 치밀한 사람은 아니다. 도준은 바보스러운, 순진무구함을 가지고 있다. 가끔 너무나 새하얀 색이 섬뜩함을 주는 것처럼, 도준이 지닌 순진무구함은 의도치 않는 섬뜩함을 지니고 있다. 순진함이 절대악으로 돌아서는 충동적인 순간은 그다지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도준은 치밀하고 계산적이라기보다 본능적으로 행동하는 인간이다. 버스정류장에서도 스스럼없이 볼일을 보고, 자신을 ‘바보’라고 무시하는 사람들에게는 한치의 망설임 없이 덤벼든다. 이렇게 원시적인 동물 같은 ‘새끼’를 품어내기 위해서는 어미 역시 원시의 세계로 뛰어들 수 밖에 없다. 
 


도준의 충격적이고도 충동적인 행위 뒤에는 엄마가 있었다. ‘바보라고 무시하면 가만두지 마’ 엄마가 도준을 지키고자 가르친 습관이 결국 도준과 엄마의 사슬이 되었다. 영화를 보고나면, 과연 엄마가 도준을 지켜낸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엄마의 행위는 모두 도준을 위한 것이었지만, 결국 돌이켜보면, 그것은 도준에게 더 큰 상처를 주기도 했고, 그가 저지른 파멸의 행위의 단초가 되었다.

영화에서 엄마와 아들은 사회적인 관계 뿐 아니라, 그저 개인과 개인의 관계로도 그려진다. 때때로 혜자의 헌신은, 관계적인 의무처럼 느껴진다. 가장 가깝고 가장 아끼는 사이,가 모자관계의 일반적인 통념이고 그들은 그것을 지켜내고자 하지만, 결국 서로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는 것도 그들이다. 게다가 그 둘은 사실 그닥 서로에 대해 많이 알고 있지도 않다. 엄마의 맹목적인 보호는 그 둘의 관계를 좁히는 것이 아니라 더욱 균열을 만들어낸다.
점점 더 파괴되고 상처나는 두 관계가 명백히 눈에 보이면서도, ‘모자관계’라는, 그 둘을 구속하는 통념과 의미 속에서 그들은 마치 못 본 척 끌어안고 상처내기를 반복한다. 그 관계의 징글징글함을 명민하게 포착해낸다. 

 



봉준호 감독은 <살인의 추억>이후 봉테일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감독의 말로는 그 별명에 ‘갇혀있다’고 말한바 있다. 자신은 그다지 디테일에 집착하는 스타일이 아니라는 거다. 하지만 <마더>에서도 곳곳에 봉테일의 면모가 드러난다. 여기서 그 면모란, 단순히 병적인 꼼꼼함을 이르기보다는 상황과 환경에 대해 굉장히 감각적이라는 거다. 이를테면 경찰서에 처음 들어오는 혜자가 품에 한 가득 박카스를 들고 와 일일이 형사들에게 나눠주는 장면이라든지, 횟집에서 변호사에게 아부를 하는 혜자의 대화 등 아주 일상적인 상황에서의 핵심을 포착해 뒤틀거나 낯설게하는 탁월한 재주가 있다. 일상에 관심이 많고, 삶에 남다른 센스를 지니고 있는 봉테일 만의 색깔이 드러나는 것이다.

또한 김혜자의 연기는, 그것이 연기를 넘어 그녀가 마치 원래 그런 듯한 섬뜩함을 보여준다. 감독과 배우가 캐릭터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있었을 때만 가능한 장면들이 곳곳에 눈에 띈다. 뿐만 아니라 황영희, 신새벽등 연극배우들이 무게감 있는 조연으로 등장해, 낯선 느낌과 묵직한 연기력을 동시에 선보여 더욱 영화적 완성도를 높인다.  

이 영화의 에너지는 하강한다. 그것이 어디로 향해있든, 그 에너지는 역동적이고, 무척,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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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을 잃은 여자, 신애는 아들과 함께 남편의 고향 밀양으로 내려온다. 신애의 과거는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자신을 모르는 곳에서 새로운 출발을 하고 싶다는 그녀를 보니 이전의 시간이 그녀에게 결코 녹록치 않은 모양이다. 허나 새로운 곳에서의 시간도 그녀는 버겁기만 하다. 이방인인 그녀를 둘러싼 소문이 그녀보다도 먼저 사람들에게 도착해 그녀는 졸지에 ‘불행한 여자’가 된다. 숨바꼭질을 좋아하는 아이는 갑작스럽게 납치되어 영영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어버렸다. 밀양이 시작되는 곳에서 만난 종찬. 그는 그녀의 시크릿 선샤인처럼, 그때부터 내내 그녀의 주변을 맴돈다.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신애가 어떤 과거를 지녔는지, 아이가 어쩌다 불의의 사고를 당했는지 이 영화는 관심이 없다. 그녀를 둘러싼 사건들은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다. 화면에 보이는 것은 오롯이 자그마한 신애의 몸뿐이다. 우리는 그녀의 반응을 통해서만 사건을 느끼고 알 수 있다. 이 영화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견딜 수 없는 고통에 빠진 그녀가, 이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영화는 불편하다. 관객으로서, 신애한테 감정이입 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신애는 낯선 캐릭터다. 이것은 감독의 계산이다. 이창동은 관객이 그녀를 “주관적으로 이입되는 것보다 한발 물러서서 보도록” 했다. 컷과 컷 사이에 그녀는 자세한 설명이 없이도 극단적인 감정을 오가는 여자다. 그녀는 자존심이 강하고, 생활력도 강하고, 무엇보다 의지가 강한 인물이다. 때문에 다른 여자와의 관계가 있던 남편이 자신만을 사랑했다고 굳게 믿을 수 있으며, 고통 가운데 단번에 종교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 그러하기 때문에, 자신의 믿음이 흔들렸을 때 철저하게 절규하고, 저항한다. 누구도 그녀 곁에 다가설 수 없다. 누구도 함부러 그녀의 고통을 이해하거나 위로할 수 없게 만든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위로하고 기도하고 가까이 다다가지만, 실제로 그녀의 가장 가까이 있는 인물은 매번 그녀의 몇 걸음 뒤에 머물러 있는 종찬이다.

 

두 번째 불편했던 영화는, 종교적인 부분이다. 기독교의 풍경이 그려지는 모습에 의구심을 품었다.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감독은 이런 풍경으로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 이창동 감독은 스스로 말하듯이 종교에, 혹은 타인에게 예의가 있는 사람이라고 느꼈다. 신애를 묘사하는 방식이나 교회 풍경의 묘사에 있어서 고민한 흔적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감독 코멘터리를 참고하시길) 적어도 대상을 두고 함부로 아는 척 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철저히 신애의 신체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어찌보면 자극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기독교 설정은 사실 하나의 배경에 그친다. 그것은 그저 위로하는 사람들의 풍경인데, 종교가 건네는 위로는 일반인이 건네는 그것보다 훨씬 적극적이다. 때때로 우리가 너무도 쉽게 건네는 위로의 풍경- 너를 이해한다고 쉽게 단정짓는 풍경을 극대화시킨 것을 기독교적인 설정으로 표현했다고 본다. 위로하려는 노력보다 앞서는 말은 때때로 소외를 낳는다. 신애 근처의 많은 사람들이 모두 신애를 위하지만, 신애는 늘 소외되어 있다. 신애 스스로도 자신의 내면과 화해하지 못하고, 애써 웃음을 지으며 스스로를 소외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감독은 그녀의 감정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극단에 치달은 그녀의 모습은 사뭇 공포영화를 보는 것만큼이나 무섭고 충격적이다. 하늘(신)에 저항하는 그녀의 작은 몸뚱아리는, 인간 존재의 한계에 부딪쳐 안간힘을 쓴다. 누구도 그녀의 고통에서 예외일 수 없고, 누구도 그녀를 위로하는 실체없는 손과 다름 아니다. 그러기에 관객은 주체이자 객체가 되고, 어느새 밀양이라는 세계 속 하나의 조연이 되어 그녀를 바라보는 듯한 몰입을 하게 된다.

 

내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겨우 용서를 베풀러갔더니, 그 죄인은 벌써 구원을 받고 평화 속에 놓여있다. 이 어처구니 없는 용서(그녀)와 용서(신)의 간극. 하늘과 땅의 거리만큼 벌어진 망망한 간극 속에 홀로 놓여진 작은 영혼. 그녀는 바람처럼, 때때로 작은 회오리처럼 흔들린다. 관객은 그런 그녀를 계속 본다. 우리는 타인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우리가 그녀의 고통을 지켜보는 것은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가? 감독은 왜 그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의 한 가운데로 관객을 몰아넣는가?

 



영화는 끝이 나도, 그녀의 삶은 그렇게 계속 될 것이다. 그녀는 때때로 눈을 치켜뜨며 하늘을 올려다 볼지도 모른다. 종찬은 계속 그렇게 머물기만 할지도 모른다. 영화는 끝날 때까지 그녀의 삶에 어떠한 변화도 구원도 주지 않는다. 하지만, 희망이라고 하기엔 무척이나 미미하지만, 그녀가 마지막 장면에서 웃는다. 양복가게 주인여자와 평상시처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앞에서도 충분히 나누던 일상적으로 나누는 안부임에도 불구,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 나는 주인여자가 그녀에게 “병원에서 잘 먹고 잘 쉬었나베”하며 툭 말을 꺼냈다 얼른 살짝 ‘아차 잘못말했다’하며 고개를 돌려 입을 가리는 장면. 그 모습을 보고 터덜 웃음을 터뜨리는 신애.

 




함께 웃는 두 사람 장면에서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살아갈 수 있겠다. 타인의 고통에 섣부른 위로가 아니라, 작은, 아주 작은- 입을 가리고 실수를 용인하는 정도라도- 배려가 있다면, 당신과 나는 함께 웃을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은 결코 아픔을 치유해주지는 못하지만, 그 아픔도 삶의 한 조각처럼, 내리쬐는 햇볕처럼 그대로 품고, 한번 웃어주고 우리는 그렇게 계속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너를 이해할 수 있다는 만용, 덜 불행한 내가 더 불행한 너를 위로해주겠다는 무의식적인 만용에 한번만이라도 의심을 품을 수 있다면, 한번만이라도 그것이 상대를 소외시킬 수 있다고 배려할 수 있다면, 적어도 우리는 이렇게 함께 살아갈 수 있는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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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주교 암살이라는 임무를 마치고 난 레이에게 보스는, 2주간 벨기에의 관광도시 브리주에 가 있으라는 명령을 내린다. 함께 떠나있으라는 명령을 받은 켄은 브리주의 자연풍경과 예술미 넘치는 도시 관광을 즐기지만, 입만 열면 욕이요 불평인 레이는 모든 것이 지루하기 짝이없다. 이윽고 레이는 영화촬영장에서 만난 미녀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켄은 자신만의 즐거움에 탐닉하는, 평안한 시간을 보낸다. 그것도 잠시. 캔은 보스인 해리의 연락을 받는다. 바로 임무 수행 중 실수로 아이를 죽인 해리를 처벌하라는 것.

2인자 캔은 보스의 명을 따라 공원에 있는 레이의 뒤통수를 총으로 겨누지만, 그때 레이 역시 자신의 머리를 스스로 겨눈다. 아이를 죽였다는 자책감에 본인 역시 자살을 시도한 것이다. 이 순간, 그러니까 캔이 해리의 명령을 무시하고, 레이를 설득하여 떠나 보내는 순간, 순조롭게 흘러가던 모든 이들의 일상과 브리주라는 공간이 어긋나기 시작한다.  

 

 

모든 것은 원칙을 어기는 순간에 촉발된 것이다. 레이가 임무에 없었던 아이를-고의든 실수든-죽였기 때문에, 캔이 죽여야하는 레이를 살려보냈기 때문에, 호텔방에만 있으라는 명령을 어기고 레이가 여자와 사랑에 빠졌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그리고 원칙을 만든 자-보스-는 이 모든 어긋난 일들을 심판하러 브리주로 날아온다. (해리는 바로 <더 리더>의 훈훈한 남자 랄프 파인즈다! 짧은 머리에 야윈 얼굴로, 냉혹한 인상의 킬러를 만들어냈다!) 



정말이지 그들은, 킬러라고 치기엔 이상하단 말이지. 그들은 원칙주의자고, 도덕을 중시 생각한다. 임무로 자행하는 살인과 범죄는 도덕 예외로 적용된다. 그것은 일이기 때문이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쉽게도 죽이는 킬러 주제에, 실수로 저지른 아이의 죽음 앞에서 자살을 시도할 정도다. 또한 보스는 그 때문에 자신의 부하를 처단하려고까지 한다. 이게 웬 아이러니란 말인가.

이렇게 원칙적인 킬러들 앞에 놓인 세상은 결코 원칙적이지 않다. 우연과 무계획적이고 뜻하지 않았던 일들이, (일들만이!) 이들의 예상과 계획을 보기 좋게 비웃는다. 그 때문에 이들은 충돌을 일으킨다. 레이는 죽고자 할땐 살고, 살고자 할땐 죽는다. 캔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레이를 떠나보내고 싶어하지만, 레이는 어쩔 수 없이 돌아오게 된다. 해리는 자신의 원칙을 완수함으로써 고고한 킬러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지만, 그 역시 끊임없는 우연에 휘말려 레이와 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킬러들의 도시>가 흥미로웠던 지점은, 이 원칙주의자들- 고결한 삶을 살아내고 싶어하는-앞에 놓인 세상 속 우연의 풍경이다. 여기에서의 우연은 헐리우드 영화들의 그것과는 다르다. 하필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든지, 뻔히 예상되는 우연을 남발한다는 식 등의 쉬운 아이러니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모든 일에 원인과 결과가 있다. 이를 테면, 레이가 다시 브리주로 돌아오는 것을 보자. 우연히 해리에게 붙들린 것도 아니다. 마음이 바뀐 것도 아니다. 참 레이다운 이유다. 전날 여자의 집에서 그의 옛 애인을 때린 이유로,(이것 역시 레이에게는 어쩔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는 떠나는 기차에서 붙들려 돌아오게 된다. 레이의 모든 행동과 수다스러운 말이 그의 죽음의 원인이 된다.  

 



이 영화를 보고 숭고미를 떠올린 까닭은, 바로 이들이 고결한 삶을 살고자 하는 킬러들이기 때문이다. <킬러들의 수다>라고 제목을 헷갈려도 무방할 정도로 영화 속 세 명의 킬러들은 끊임없이 대화를 한다. 물론 말은 그다지 통하지 않는다. “너는 네 삶을 고쳐나갈 수 있어!”라는 켄의 말에 “그럼 의사가 되라구요? 시험봐야 되잖아요!” 레이는 이런 식으로밖에 대꾸할 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언제나 원칙을 염두에 두고, 그것에 대해 대화한다. 때문에 다른 영화에서 볼 수 없는 킬러들의 모습들이 포착된다.

캔과 레이가 미술관에서 종교화를 보며 죽음에 대해 논하는 모습을 보라. 이들은 죽음 자체보다 그들이 살며 저지른 죄를 두려워하고 있다. 죄를 인식하고 죽음, 끝을 인식한다. 숙소(BnB)에서 해리와 레이의 대결장면은 어떤가. 숙소 주인이 임신을 하고 있기 때문에, 밖에서 싸우자고 한다. 레이가 창밖으로 뛰어내리고, 해리는 문밖으로 뛰어나갈 것. 서로 정한 원칙을 위배하는 일은 결코 없다. 적어도 레이의 적인 해리는 반칙으로 레이를 공격할 것 같지만, 그들은 충실하게 약속을 행한다. 그들은 약속과 원칙을 지키는 고결함을 무엇보다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숭고함이란, 자신의 존재가 광대한 우주 속에 하찮음을 깨닫는 것이다. 자신의 하찮고 사소한 감정, 욕망, 의지를 내려놓는 순간 더 큰 질서와 자연세계를 발견하는 것이다. 자신의 욕망과 바라는 것 너머의 원칙을 목숨만큼이나 지키려고 하는 이들의 모습에서 고결한 삶에 대한 갈망(혹은 강박)을 느꼈고, 과대 해석해서 나는 그만, 숭고한 아름다움까지 느껴버린 것이다. 그들의 죽음, 혹은 집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나약한 인간인 그들이 지닌 의지와 신념에 관한 감동이다. 우연의 세상속에서 그것을 지켜나가고자 하는 그들의 고투에 대한 감동이다.

결국, 세 사람은 모두 죽는다. 세 사람 모두에게 살 기회가 있었지만, 그들은 그 기회를 선택하지 않았다. 끝까지 원칙 때문에 죽임을 당하고, 희생하고, 스스로 죽고 말았다. 이 어처구니없는 마지막 장면에서 허무의 감정을 느끼려는 찰나, 어쩌면 그들은 고결한 삶을 지키기 위해, 어쩌면 집착한 나머지 죽을 수밖에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브리주의 이 세 명의 킬러들은 그래서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 아름다운 브리주에서. 시간을 고수하듯, 변함없이 과거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예술의 도시 브리주에서 말이다.   

여기서 레이는 콜린 파렐이다. 가장 없어보이는 킬러를 기막히게 연기해냈다. '이런,진상!'이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끔 하는 특유의 블랙코미디스러운(?)연기는 골든글로브도 인정했다. 그는 이 영화로 골든글러브 남우주연상을 타냈다. (브랜단 글리슨, 랄프라인즈의 연기도 물론 좋았지만!) 충분히 그럴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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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짝, 스포일러 있음)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을 시험하는 서바이벌 게임.

이미 결론은 나왔다. 우리편은 일곱명이나 되고, 저쪽의 적수는 단 두명인데, 모두 당한다? 죄수의 딜레마처럼, 모두가 살고 싶지만, 결국 한명씩 죽어나가게 되어있다. 아무리 협동하려고 해도 협동할 수 없는 상황, 스스로를 잃어버리면서 혼란의 빠져가는 사람들. 그 혼란 속에서 멈출 수 없는 게임은 계속된다. 

왜 게임을 그만 둘 수 없는가? 

어째서 처음부터 그것이 단순한 게임이 아니었음을 알고,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을 알고도 게임을 게속 진행했는가?  시작은 게임이었지만, 단번에 이것이 단순한 놀이가 아님을 깨달은 참가자들에게 그 다음 게임은 더이상 게임이 아니게 된다. 이 곳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서바이벌 미션 자체가 게임이 되면서 참가자들은 이 게임을 계속 진행하는 것만이, 게임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결국 이 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사람은 단 한명 뿐이다. 이 게임의 룰은 서서히 참가자들 스스로를 조여온다. 그들은 모두가 함께 빠져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최후의 1인은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모순의 상황에 빠진다.  




장 PD의 계략대로 흘러가는 이야기는, 인간의 욕망과 그 반응이 무척이나 단순화되어 그려져있다. 아무리 패닉 상태라 하더라도 캐릭터의 일관성을 고려하지 않은채 쉽게 돌변하고, 쉽게 변화하는 인물상은 몰입을 방해했다. 인물들의 변화가 변화로 느껴지지 않고, 단순히 '미쳐간다'는 설명으로 그치는 것이 가장 아쉬운 점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야말로 비정상 캐릭터인 장PD가 지니고 있던, 마지막에서야 밝혀지는 그의 비밀이 인상적이었다. 그의 이러한 기이한 행위의 비밀이 과거의 한 사건에 연관되어 있고, 그 사건에 대한 복수라는 것이다. 그 사건은, 범죄 현장을 보고도 모른척했던 사회적인 무관심, 자신의 안위만을 염려해 모른척한 일반 사람들에 대한 분노다. (물론 여기에서도 여러명의 인물에게 노출시키기 위해 여자를 이리저리 끌고다닌 점은 너무나 인위적이다.-_-!!!) 타인에 대한 무관심에의 분노라면 사실 그 누구라도 마음이 무겁지 않은자가 없을 것이다. 물론 영화에서는 극단적으로 표현해놓았지만, 곰곰히 장PD의 심기를 헤아려보면 그러하다. 



그러니까, 이런 미친 게임을 벌인 박휘순이 그저 또라이로 밝혀지고 끝나면 시시해지는 것인데, 장PD의 그러한 사연과 그의 분노가 조금은 공감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범죄 현장에서 묵인했던 사람들에 대한 분노. 하지만 과연 그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는 어떻게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타자로 그 자리에 있었다면, 이러한 책임을 그 역시 피할 수 있었을까? (있지, 우린 누구나 겁에 질려서 살아간단 말이야.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문제이고, 부디 이 영화를 본 누군가가 '나는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다면 충분히 성공했다고 기꺼이 말할 수 있겠다.

 또 하나 덧붙여, 장PD가 선택한 최후와 신민아만 유일하게 살아나 '무사엔딩'을 맞는 것에 대해 아마 적지 않은 관객들이 공감하지 못했을 거라는 우려가 들었다. 그나마 그녀가 게임 중간중간에 인간미를 보여주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마지막에 살아남는 사실에 설득력을 더하기 위해 인간미를 노출한 것일까?...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알고보니 본성이) 착한 사람이라 좋은 결말이다- 라고 한다면, 이거 조금은 김 새는 결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덧붙여.. 아마도 현장 스틸. 요즘엔 이런 사진이 더 재밌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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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바르셀로나~  

 흥겨운 음악과 함께 영화는 시작된다. 마치 책을 펼치듯 나레이터가 나와 주인공 소개를 한다.


"비키와 크리스니나 둘은 대학시절부터 단짝이었고 기호가 같았으며 의견도 대게 일치했다.그러나 사랑문제에서는 어느 한구석 비슷한 곳이 없었다."

언제나 수다스럽고도 재치넘치는 영화를 선보이는 우디엘런의 흥미로운 영화가 개봉했다. 비키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 이해할 수 없는 제목으로 번역된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

귀엽고도 엉뚱한 주인공들을 잘 살펴보면 웃음이 베시시 터져나오다가도 어쩐지 몰입된다. 공감된다. 어쩐지 나같기도 하고, 이런 점은 나 닮기도 하고…둘다 나네?!





친절한 나레이터의 목소리를 빌려 인물을 분석해보자. 나는 어떤 유형에 속하는 사람인지 살펴보자.

"비키에게는 사랑의 고민이나 쟁취욕 같은 건 없었다.
굳건한 현실주의자였다. 남자에게 요구하는 건 진지함과 안정성이었다.

크리스티나는 전혀 다른 사랑을 기대했다.
깊은 열정에 따르는 고통을 지그시 받아들였으며, 위태로울 지경까지 그 감정을 밀고 나갔다.그런 고투 속에서 무엇을 얻었냐고 물으면, 입을 열지 못할 것이다 
뭘 바라고 한 일이 아니기에. 그것이 비키가 가장 우선시 하는 점이었다."

사랑에 관한 그 둘의 태도는 분명히 다르다. 이것은 그녀들의 삶의 태도와 비슷하다. 삶에 안정성을 추구하는 유형. 언제나 계획한 것이 그대로 이뤄져야 만족감을 느끼고, 자신과 주변에게 성실한 타입이 바로
비키다.

반면에 크리스티나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생동감을 가진 여자다. 때론 그 생동감이 지나쳐 위험한 모험에 전부를 걸게 하기도 한다. 늘 뜨겁고 약동하는 시간을 소유하지만, 안정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그녀에게 안정은 곧 따분한 감정을 일으키고, 그것은 그녀가 참아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모험과 방황은 크리스티나에게 단짝친구와 같은 것이다.





이러한 두 친구에게 열정적이고도 괴팍한 화가 후안 안토니오가 나타난다. 이 둘은 그에 의해 묘한 감정의 관계로 엮이게 되는데 그 방식도 큰 차이가 있다. 계획하지 못한 일에 닥치자, 비키는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우선 몸을 사린다. 하지만 혹시나가 역시나. 예상치못한 문제가 생기자 그야말로 혼란에 빠진다. 끊임없이 고민하고, 그럴수록 문제는 점점 진지하게 커져만 간다. 비키는 되돌려 고칠 수 없는 과거에 집착하고, 괴로워한다.




크리스티나는 어떤가. 새로운 환경에 정면으로 맞부딪친다. 같은 일이 크리스티나에겐 문제가 아닌 즐거움이 된다. 그녀는 예측하지 못한 일까지 일상으로 끌어안는다. 언제나 변화와 모험을 갈망했던 크리스티나는, 그런 상황을 꿈꾸기만 했지 스스로 만들어 낼 줄을 몰랐다. 늘 사건을 만들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후안 안토니오는 크리스티나에게 연인이자 갈망의 대상이다. 하나의 사건에 고여있는 비키와 달리, 크리스티나에게는 문제는 끊임없이 이동하고 움직인다. 결국 후안 안토니오의 전 부인 마리아 엘레나가 이르러 삼각관계에까지 이르게 된다.


마리아 엘레나! 그녀의 기질 역시 흥미롭다. 그녀는 심한 조울증을 갖고 있는 전형적인 예술가 스타일이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상황에 휩쓸리지 않는다. 그들의 기질이 상황을 휩쓸어버린다. 결코 짐작할 만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혼란 속에서 홀로 고요한 안정을 발견하기도 하고, 안정 속에서 폭풍 같은 감정의 고요를 일으키기도 한다.  





후안 안토니오, 마리아 엘레나, 그리고 크리스티나! 제멋대로 살아왔고 살아가는 세 사람은 서로에게서 공통점을 찾는다. 새로움에 대한 집착, 모험에 대한 갈망 등은 그들에게 있는 결핍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그들은 세 조각난 톱니바퀴가 맞춰지듯 서로의 관계 속에서 결핍된 것을 찾아낸다. 그리고 여타 영화 속에서 쉽게 마주치기 어려웠던 흥미로운 삼각관계를 형성한다. (그들의 캐릭터 자체가 흥미롭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불균형적이어서 오히려 이들에게 안정감을 주는 이 관계 역시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결국 또다른 결핍에 이끌려 관계의 삼각형을 깨고 부순다. 그리고 그래온 것처럼, 그들다운 제멋대로의 삶을 지속해간다.




현실주의적이고, 성실한 타입의 비키, 그녀에게 모험은 머나먼 하나의 이상과 다름없다. 크리스티나는 변화와 모험을 갈망하지만, 정작 스스로는 삶의 흐름을 만들어내지 못해 방황한다. 후안 안토니오도 자유롭고 주체적으로 보이나 알고보면 아내 마리아 엘레나의 세계 아래서 영향을 받고 있는 존재다.  

이들 중 가장 자유롭고 삶을 주체적으로 살고 있는 사람은 예술가 마리아 엘레나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어떤 억압과 욕망도 참아내지 않고 분출해버린다. 미술로서 분출하는 능력도 있고, 방법도 알고 있다. 그럼 마리아 엘레나 만이 행복한가? 과연 그런가? 분노를 이기지 못해 남편을 향해 총을 겨누고, 소리를 지르고, 자살 시도를 하는 그녀의 삶은 정녕 자유롭고 행복한가? 그것은 곰곰히 생각해볼 일이다.


비키의 현실순응적이고 안정을 추구하는 면모, 크리스티나의 열정과 갈망, 이것은 내 안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모습이다. 잘 들여다보자.
우리는 마리아 엘레나 같은 존재-자유로운 자-를 갈망하며 비키처럼 고민하고, 크리스티나처럼 방황하지 않는가?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를 보라. 내 안에 있던 비키와 크리스티나를 마주해보자. 아닌 척 모른 척해도 결국 그들의 모습 속에서 남몰래 키득댈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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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들어 본
서른 편 가량의 영화를 천천히 생각해보았다. 많은 영화들이 이미지가 되어 머리를 스쳤다. 한 장면 한 장면이 영화 컷처럼 넘어가는데, 유독 한 영화의 잔상이 오래 남았다. 

 바로, <시계태엽오렌지>다.   






굳이 방금 순간이 아니더라도, 이 영화는 보고 난 이후 문득문득 내게 하나의 이미지가 되어 떠오르곤 했다. 분명히 다른 영화였다. 내 기억속에서도 꽤 오래 정착해있는 걸 보니, 그만큼 충격적이었고, 그만큼 인상적인 영화였다. 

 가장 먼저 알게 된 것은 '영화의 이해' 수업 시간이었다. 교수님은 고심하며 말씀하셨다. 함께 보고 싶은 영화가 있는데, 이걸 수업시간에 틀어도 될지 모르겠다며, 좀더 생각해보겠다고 하셨더랬다. 그리고 결국 선정성의 이유로 관람은 무산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 말씀이 기억에 남았다. "이 영화를 꼭 너희들과 함께 보고 싶었다"는 말.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태엽오랜지>는 문학으로 따지면 고전으로 칠 법한 영화다. 당시에도 충격적인 영상으로 런던에서도 상영금지처분을 받는 등 화제가 되었고, 미래를 예견하는 줄거리나, 독특한 화면구성, 편집 등이 무척이나 흥미로운 영화다. 즉, 필독도서마냥 필수관람해야 하는 영화 리스트로 오래 품고 있었던 영화란 것이다. 

허나 DVD 위에 그려진 말콤 맥도웰의, 익살맞지 못해 괴기스럽기까지한 미소는 선뜻 영화와의 만남을 허락치 않았다. 어쩐지 그랬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나름 영화 볼 수 있는 최적의 준비를 갖추고 이 영화를 만났다.  







영화 관련 서적에서 매번 수록되어 있는 첫 장면 이미지. 음란한 밀크바에 앉아, 반쪽만 긴 눈썹을 붙인 채 카메라를 응시하는 말콤 멕도웰의 모습. 아직도 생생하다. 이 영화에서는 특히나 장면 장면의 이미지가 강렬하고 굉장히 세련되었다. 소품이나 배경 하나하나 신경쓴 흔적이 역력하다. 

미래의 런던을 상징하는 심플하고 모던한 집 디자인, 의상들의 기이한 디자인(낯설지만 점차 익숙해지는), 강렬한 원색- 영화 속 단순하고도 강렬한 이미지들은 알렉스와 그 친구들의 어긋난 행동을 더 부각시킨다. 이들은 파괴자고 혼란을 일으키는 자들이다.  

어찌보면, 현대 런던은 모던을 상징하고, 폭력과 파괴를 일삼는 알렉스와 친구들의 행동은 참으로 구식처럼 느껴진다. 그러므로 이들의 행동은 용납될 수가 없다. 미래, 현대의 사회는 이들 조차도 심플하고, 깔끔하게 통제하고자 한다. 현대가 원시적인 것을 다룰 때 주로 쓰는 무기는 과학이다. 발달된 과학은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개인의 성향 마저도 변화시킬 수 있다.   







이 영화는 다양한 문제를 던져주는 영화다. 이를테면, 과연 과학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과연 인간의 본성, 성향 (소위 신의 영역)까지 침범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이것이 결코 허황된 상상이 아니라는 것은 현재의 한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약물이나 신경치료를 넘어서 이제는 유전자를 통해 '타고난 것'까지 조작해보려는 지금의 시도는 스탠리큐브릭 상상력의 분명한 연장선상에 놓여있는 것이다.   

그보다도 내게 흥미롭게 다가온 것은 바로 이 영화가 폭력성을 드러내는 방식에 있다. 내가 갑자기 이 영화에 대해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당시 메모해 둔 이 한 문장 때문이었다.  

" 나 역시 화면 속에 보이는 폭력과 선정적인 것들에 쾌감을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영화에서 폭력성은 쾌감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다. 알렉스는 이유없이 범죄를 저지른다. 그는 마치 그것들을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알렉스가 저지르는 대부분의 폭력, 혹은 상징이 성적인 것과 연관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가장 본질적인 쾌락을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서서히 관객들을 자극한다.  

첫 장면부터 난무하는 폭력성에 누구든 불쾌한 감정을 갖게 될 것이다. 하지만 너무나 빈번히 자주 보여주는 폭력의 모습에 점차 관객의 자극은 익숙해져간다. 불쾌감의 정도는 낮아지고, 온전히 하나의 자극이 된다. 폭력이 폭력이라는 불편한 이름을 버리고 온전히 그 행위 자체로 받아들여지게 한다. 그야말로 폭력을 응시하게 되는 것이다.  








이유없이 저지르는 숱한 폭력들을 지켜보라. 쾌감의 자극과 비슷한 자극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유있이 저지르는 응징은 합당하고 통쾌하게 생각한다. 그것은 다만 폭력 행사에 도덕적 면죄부를 주기 때문이 아닐까? 사람의 내면에는 폭력이 본능처럼 잠재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교육이나 사회화에 의해 절제된 폭력성 말이다. 때문에 끊임없이 이 시대에도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것들이 난무하는게 아닐까.  

폭력적인 사회에서 폭력성을 잃어버린 다는 것은, 심각한 약자가 되는 일이다. 교화된 알렉스는 늑대의 사회에서 양이 되어 버린다. 폭력적인 것만 보면 구토와 경기를 일으키는 '치료'를 받은 알렉스는 보복의 이름으로 정당하게(?) 쏟아지는 폭력 앞에 그저 당할 수 밖에 없다. 

이전의 악한 알렉스에게 당했던 피해자들을 보자. 그들은 선량했기 때문에, 폭력적이지 않기 때문에 당한 것일까? 감옥에서 알렉스가 나오자, 이전에 그에게 당했던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보복을 가한다. 그때의 표정을 보라. 그들은 하나같이 알렉스의 고통을 즐기며 끔찍한  미소를 지어댄다. 그들은 모두 이전의 악한 알렉스의 모습과 다름이 없다. 그저 내면의 폭력성이 잘 교육되었는가, 절제되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차이일 뿐이다.   







원시적인 폭력성을 휘두르는 알렉스는 처벌을 받고, 치료를 받는다. 허나, 나름의 이유있이, 사연있이 저지르는 그들의 폭력은 합당성을 띠게 되고, 법 안에서 수용이 된다. 심지어 알렉스가 가장 싫어하는 음악을 틀어놓고 자살을 유도하는 등 고문에 가까운 폭력성을 내비치는데도, 그들은 이유와 목적-실험이라든지 보복이라든지-을 지녔으므로 떳떳하게 자행된다. 그런 폭력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신분은 경찰과 박사 등 고위 관리직이다. 

요즘의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폭력을 살펴보자. 아홉시 뉴스, 사회면에 나올법한 범죄들은 요란하고 어지러운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것들은 사회 안에서 재단되고 응징된다. 이런 알렉스적인 폭력도 두려운 일이지만, 사회라는 틀 내에서, 그 틀에 딱 맞게, 혹은 틀을 이용해서 저지르는 폭력성도 못지않게 끔찍한 일이다. 정치가, 법조인, 방송인 등 소위 배운 사람, 아는 사람이 저지르는 폭력들. 더 잘 알기 때문에 더 치명적으로 괴롭히는 폭력들의 경각심을 일깨운다.  

폭력은 무조건 나쁘다.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향해 자행되는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폭력을 응시하는 영화<시계태엽오렌지>는 이때문에라도 의미있고,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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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소설의 강점은 상상력과 뻔뻔스러울 정도로 시치미 떼는 환상성이 아닐까. 나는 일본소설을 그닥 즐기지 않는다. 일본문체의 특징인지, 번역 때문인지 좋게 말하면 담백하고 군더더기 없는 문장이 내겐 늘 심심하게만 다가온다. 허세스러운 수식어 문장, 어려운 문장도 질색이지만, 분명히 아름다운 문체는 너무나도 큰 읽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내가 꼽는 아름다운 문장은 단연 김연수의 문장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줄기차게 읽어대는 유일한 일본소설이 있으니, 그것은 전부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이다. 그의 소설을 처음 접한 것이 바로 이- 제목도 단번에 알 수 없는- 용의자 X의 헌신이다. (제목은 읽고나면 이해할 수 있다. 말 그대로... 용의자...X의... 헌신) 
히가시고의 책을 좋아하는 까닭은, 재미있는 이야기, 놀랍도록 풍부한 그의 지식과 관심사 등등도 있지만 무엇보다 언제나 휴머니즘적이고 따뜻한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추리소설 작가가!! 사람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담겨있는 그의 소설은 어떤 이야기든지 좋다. 그리고 늘 어떤 이야기든지 놀라울 정도로 재미있게 써낸다.   



*이 소설을 읽었을 때의 충격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다. 내가 아는 추리 소설 중에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였고, 놀라운 추리와 전개였다. 너무나 책을 재미있게 읽었던 탓에 영화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이미 여러편 나온 히가시노 원작의 영화들이 절반의 성공, 절반의 실패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헌데, 이 영화.  



*잘 만들었다. 책을 봐도 내용을 알아도 재미있다. 심지어는 한번 보고 또 보고싶다. 책 내용을 잊었을 만큼 오래되기도 했지만, 그때의 충격과 감상이 고스란히 다시 떠오른다. 역시 굉장하다. 무엇보다 캐스팅이 훌륭하다. 유카와 역의 후쿠야마 마사히루도 훈훈한 외모로 스크린을 빛내주지만, 단연 이시가미 역의 츠츠미 신이치의 열연이 돋보인다. 히키코모리같은 캐릭터의 이시가미가 영화속에서 분명히 매력을 갖고 있을 때, 관객의 편으로 만들었을 때 모든 사건과 결말이 합당할 수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매력있다.  










*문제를 내는 천재 수학자와 문제를 푸는 천재 물리학자의 대결. 이 설정만으로도 흥미롭다. 이 영화는 뿐만 아니라 수학과 과학이라는 이성의 영역과 사랑이라는 감성의 영역을 치밀하게 대결시켜놓은 영화이기도 하다. 과연 사랑을 정의할 수 있을까. 풀수 있을까. 이제껏 숫자과 논리로 점철되었던 두 남자는 사건을 통해 사랑이라는 미스터리한 사건을 풀어보고자 한다. 






* 단순히 추리 사건을 푸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히가시노는 문제를 내는 사람을 등장시켜 더 치밀한 갈등상황을 유발한다. 물론 거기에는 탄탄한 논리가 뒷받침되니까 가능한 일이지만. 게다가 고정관념을 이용해, 누구나 쉽게 빠질 수 있는 함정으로 사건을 만들어 낸다.
기하문제인듯 보이지만 함수 문제인 것- 관객들 역시 모두 기하문제를 상상하다가 통쾌한 반전에 놀라게 되는 것이다. 

* 이 영화가 인상적이었던 것은, 영화를 보고 나서 "대체 사랑이 뭘까"라는 질문을- 천재 물리학자 유카와와 같은 질문을 읇조리게 한 점이다. 용의자 X의 처절한 헌신 뿐 아니라 각 인물들 주변에 포진해있는 그 사랑의 정체는 무엇일까. 정말 궁금해지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삶의 한줄기 희망같은 그 사랑이, 그 사람이 이해되는 것이다.   


* 책을 다시 읽어야 겠다.  

* 그 훌륭한 두뇌를, 이런데 쓸 수밖에 없었다니.  

 늘 뉴스를 보며 드는 그 생각. 여러 사람에게 해주고 싶었던 그 말, 정말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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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극장이었다. 오전부터의 일정으로 피곤했고, 그날은 영화 <더 폴>이 상영하는 마지막 날이었다. 포스터는 전혀 끌리지 않지만, 입소문 자자한 영상을 직접 확인하고 싶은 호기심 + 이런 영화는 영화관에서 봐줘야 한다는 당위성(4년간 28개국에서 촬영했다는데...) + 어쩐지 내일 되면 아쉬울 것 같은 마음때문에 입장했다. 

더 폴, 오디어스와 그 환상의 문으로. 

 


 * <더 폴>은 스토리텔러 로이와 그 이야기를 듣는 소녀 알렉산드리아가 만들어내는 판타지다. 로이는 알렉산드리아를 이용하기 위해 거짓 이야기를 지어내지만, 소녀는 그 이야기를 실제로 꿈꾸고 믿어버린다. 어린 소녀는 거짓말 까지도 마법으로 만들어내고 그 이야기는 현실이 된다. 현실과 판타지를 넘나드는 이야기 구조는, 영상만큼이나 환상적이다.   



* 만만한 판타지 영화가 아니다. 이야기 하는 자의 권력과 듣고자 하는자의 욕망이 첨예하게 담겨져 있고, 그 사이에 환상을 지키려는 자와 현실을 깨우려는 자의 갈등이 면면이 담겨져 있다. 알렉산드리아가 로이의 거짓말을 믿을 수록 로이의 갈등은 커지고, 로이가 알렉산드리아의 판타지를 깨뜨릴수록 소녀의 갈등이 커진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환상적인 동화같은 영화를 촬영하기 위해, 가능한한 현실과 같은 환경에서 촬영을 했단다. 즉, 한번도 연기경험이 없고 때묻지 않은 실제 꼬마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하고, 영화속 설정을 소녀와 배우들이 정말 믿도록 설정해두었단다. 촬영기간동안 다른 배우와 스탭들은 정말 로이가 영화속에서처럼 불구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단다. 그런 믿음과 리얼리티가 있었기에 더욱 환상적인 영화가 나올 수 있었겠지!  

*이 영화는 백번 말하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  







*클로즈업한 사람의 얼굴. 페이드 아웃되면서 사막의 풍경이 그려진다. 사람의 얼굴이 고스란히 사막의 풍경으로 겹쳐지는 마술같은 영상. 탄성을 질렀다. 결코 잊지 못할 장면이다.  

*로이의 모험담은 유치하기 짝이 없다.  악당 오디어스를 향한 다섯 영웅의 복수. 오디어스의 노예, 오디어스 때문에 소중한 나비를 잃은 천재 찰스 다윈, 오디어스 때문에 누명을 쓴 폭파전문가 루이지... 사연을 가진 영웅들이 복수를 향해 모험을 떠난다. 그 복수극은 때론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유치하기도 하고, 달콤한 로맨스를 그려내기도 하고, 만화 같은 장면들을 만들기도 한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이야기의 결말이다. 이야기 하는 자, 루이는 자신의 절망 때문에 모든 이야기를 헝클어뜨리고자 한다. 그것은 현실적이고, 어른다운 결말이다. 그들은 하나씩 죽어가고 실패와 절망에 가까워진다. 듣는 자, 알렉산드리아는 결코 그 세계를 무너뜨리고 싶지 않다. 그 환상에 뛰어들어 어떻게서든 루이를 막고자 한다. 환상을 지키려는 소녀의 몸부림이 어찌나 간절하고, 애절한지 정말 눈물이 핑돌 지경이었다. 이야기는 하나의 세계다. 누군가에겐 하나의 세계다. "제발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라며 달려드는 알렉산드리아. 그녀의 진심이 이야기를 지켜낼 수 있을까. 나 역시 결말에 치달아 갈수록 발을 동동 구르면서 보았다. 어서 뒷이야기를 알려달라고 조르는 알렉산드리아처럼.

 




 

* 나 역시 이야기를 믿고, 사랑하는 사람중 하나다. 난 언제나 이야기를 이야기하는 이야기가 좋다. 그 이야기는 언제나 내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렇게 알렉산드리아가 사랑스러웠나보다. 나에게도 언젠가 그럴 때가 오리라. 내가 만든 세계와 현실세계가 부딪치게 되는 그 때. 


  

그때 과연 알렉산드리아처럼 나도 온몸을 던져 내 세계를 구해낼 수 있을까. 끝까지 저버리지 않을 수 있을까. 이 이야기는 희망보다는 절망에 가까운 영화지만 나에게는 이런 이야기 자체가 희망처럼 다가왔다. 이야기라는 거대한 세계를 만난, 내가 갖고 있는, 만들어 나가는 한 세계를 확인받을 수 있었던 희망. 그래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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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내가 글을 다시 쓰게 된다면,
  그때 가장 먼저 쓰고 싶은 글은 바로 이 영화 <레볼루셔너리 로드>에 관한 것이었다. 영화를 본지 한달 가까이 되었고, 그 사이에 많은 영화들이 내 눈과 마음을 비추고 지나갔지만, <레볼루셔너리 로드>를 보던 그 밤과 그때의 느낌만큼 강렬하지도, 오래 남아있지도 않았다. 

* 다시 글을 쓰는 일은 쉽지 않았다.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임을 알면서도 한 달 가까이 글을 쓰지 않았다. 아니, 글은 쓰고 있었다. 늘 한가지 고민에 관한 글이었다. 끝도 없는 끝을 향해 돌고 돌고 도는 그 글. 오늘 업무 보고와 선택에 대한 고민을 줄줄 써내려가는 동안 이미 나는 글쓰는 일에 지쳐있었는지도 모른다. 






*
케이트 윈슬렛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재결합은 너무도 반가운 소식이었다. <타이타닉> 이후 각자의 필모그래피를 쌓으며 성숙해진 모습으로 다시 만난 두 사람이라니. 당시 한없이 우월했던 레오는 이제 버젓한 중년의 아저씨가 다 되었고, 케이트는 좋은 영화를 거쳐오며 우아한 중년 여성이 되어 있었다.(그녀는 나이를 먹어갈 수록 더 멋진 매력을 뿜어내는 굉장한 여배우다!) 아 알흠다운 광경이여. 그 두 사람, (비록 그 영화에서 사랑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마냥 이런 설렘뿐이다.) 만약 결혼 했다면 잘 살았을까.  


*
샘 맨더슨의 전작이자 화제작 <아메리칸 뷰티>를 본 기억이 난다. 평범한 중산층 가정 속에 천착되어 있는 욕망과 희망과 절망을 첨예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아버지와 친구 딸아이의 성적 판타지, 게이 등의 소재로 상당히 센세이셔널하고, 충격적인 영화였다. 평온한 일상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긴장감. 샘 맨더슨이 명민하게 포착하는 일상의 지점이다. <레볼루셔너리 로드> 역시 평범한 가정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시한폭탄 같은 긴장감이 상시 도사리고 있다.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꿈에 관한 영화다.
꿈? 여기서 말하는 꿈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꿈에 대해 생각했다. 그것은 희망과 비슷한 맥락의 언어다. 판타지와 상상력으로 구성되어 있고 설렘을 동반한다. 주술성도 갖고 있는 마법의 단어다. 어찌보면 꿈을 갖는다는 것은 사랑에 빠지는 일과 비슷하다. 평범한 것이 다르게 보이고, 무표정한 얼굴에 웃음을 자아내니까 말이다. 꿈은 그런거다. 남북통일이나 세계평화가 비전일 수는 있어도 꿈이 될 수는 없다. 꿈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자기 중심에서 부터 시작하고, 나로부터 이뤄지거나 무너지는 것이다. 환상으로 시작해 현실로 종결되는 문제다.  


* 왜 사는가? 왜 공부를 하고 왜 돈을 벌고자 하는가?
행복해지고 싶은 꿈이 있어서이다. 단지 자본주의 세계 속에서 당장 손앞에 떨어진 일만 쫓다 보니 목적이 상실되고 수단이 목적으로 전도되었을 뿐. 프랭크와 에이프릴의 꿈은 파리로 가는 거다. 왜냐하면, 이전부터 꿈꿨던 그곳에 가면 행복할 것 같기 때문이다. 아니, 꿈꾸던 그곳에 가는 것 자체가 행복이기 때문이다. 


*첫사랑의 설렘과 결혼후의 권태까지,
 교차편집으로 드러나는 그들의 감정과 삶은 그야말로 찬물과 더운 물처럼 극을 달리한다. 첫 사랑의 열정은 어디로 갔는가. 처음 이사 올 때의 흥분과 설렘은 어느 곳에 있는가. 배우가 되고 싶었지만, 좌절해버린 에이프릴. 한결같은 복장으로 한결같은 출근길에 지루함을 느끼는 프랭크의 삶은, 많지 않은 내 삶과 시간과도 무척이나 겹쳐져 있다.  

 





* 특히나 프랭크의 출근길. 매일 빨간 장거리 버스 안에 몸을 구겨넣어 차 문에 빈대떡처럼 달라 붙어 고
속도로를 달리는 내 모습과 절로 겹쳐진다. 버스 안에서 보는 버스 안 풍경이 떠오른다. 모두가 같은 양복을 입고, 같은 크기의 사각 가방을 들고 같은 자세로 좁은 버스 안에 끼어있는 아저씨들. 창 밖에서 차 문에 붙은 내 모습을 바라보는 공허한 시선들. 다들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고 있을까. 의문이 들게끔 한 방향으로 모두 달리는 차들.    


* 싸우는 것에도 지쳐버린 젊은 부부.
에이프릴은 문득 자신의 그런 상태를 깨닫는다. 그리고 다행히도 이전의 삶의 열정을 떠올려낸다. 좋았던 시절. 에이프릴의 잘못을 하나하나 꼬집어대기 전의 프랭크는 "삶을 진정으로 느껴보고 싶다. 파리에 가고싶다"고 말했었다. 에이프릴은 용기를 낸다. why not? 에이프릴은 자신의 삶에 진정한 레볼루셔너리 로드를 내고자 한다. 


 *   

프랭크: 프랑스에 간다고 쳐. 그럼 거기서 내가 뭘 해?

에이프릴: 당신이 7년전에 했어야 하는 일을 하는거야. 당신의 시간을 갖는거야. 태어나서 처음으로 당신이 진짜로 원하는 것을 하는 거야. 그것을 찾아내면 그 일을 하면 돼.  

프랭크: 여보, 그건 현실적이지 못해 

에이프릴: 아냐 프랭크. 지금 상황이 비현실적이야. 건강한 마음을 가진 남자가 맞지도 않은 일을 하고 견디기 힘든 집으로 오고 견디기 힘든 아내와 있는게 비현실적인거야.   

우릴 봐, 모두 바보같은 착각에 빠져있어. 운명에 순응하고 애들이나 잘 키워야 된다는 착각. 그것때문에 서로를 힘들게 해. 

지금 당신 숨막히게 살고 있잖아. 당신 자신을 부정하며 그렇게 살고 있잖아. 모르겠어?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아름다워. 당신은 위대해. 이건 기회야 프랭크



 




* 두 사람에게 꿈이란 것이 생겼다.
일상은 꿈 앞에서 얼마나 가소로워지는가. 그들의 달라진 일상을 보라. 하지만 꿈은 풍선껌처럼 불기는 쉽지만, 키우고 간직하는 일은 쉽지가 않다. 그들은 금세 일상의 도전을 받는다. 과연 그들은 프랑스에 갈 수 있을 것인가.  


* 나 역시 간절히 프랑스를 꿈꾼다.
내가 프랑스에 가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직장이 있기 때문에? 프랑스에서의 삶이 막막하기 때문에? 그곳에 간다는 일이 정말이지 비현실이기 때문에? 나를 붙잡고 있는 수만가지 의심의 고리들이 이들 부부 역시 붙들어 놓는다. 샘 맨더슨의 영민함이 이러한 지점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영화라는 판타지 속에서 들어내는 삶의 기묘한 갈등, 긴장, 리얼리티를 포착해낼 줄 안다. 영화 속 주인공의 꿈이 내 꿈이 되는 순간, 관객은 영화에 빠져든다. 그들과 함께 꿈을 꾼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들이 부디 프랑스에 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 이들 부부 말고도 흥미로운 인물이 하나 나온다.
이웃 노부부의 아들 존이다. 정신병을 앓고 있는 존은 이들 부부의 프랑스행을 유일하게 응원하는 인물이다. 대게 영화의 화법이 그렇듯이 존은 이상한 인물처럼 그려져 있지만, 진실을 이야기한다. 삶과 부딪치며 겪는 그들의 선택들에 대해 진실 혹은 진심을 말해주는 인물이다. 그 때문에 존은 가장 큰 갈등으로 치닫는 빌미를 제공한다.  


* <아메리칸 뷰티>를 본다면,
 이 영화 역시 그야말로 샘 맨더슨적인 이야기, 그다운 말하기라는 것을 금방 눈치채리라.(너무나도 즐겁다. 그를 존경한다.) 결말 또한 평범한 가정에서 출발한 이야기 치고 무척이나 충격적이다. 파리가 중요한게 아니다. 그들의 꿈이 로드, 출발과 과정과 끝이 보는 이의 마음을, 꿈을 한없이 휘젓고 흔들어 놓는다.  


*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바로 이것이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꿈은 달콤하지 않다. 현실적이고 날카롭다. 자, 지금 네 모습을 봐. 모든 것이 네 선택이었어. 지금 이렇게 있는 것도, 앞으로 어떻게 되는것도 고스란히 네 몫이고 네 선택이라고. 맘에 안든다고? 불만이 있다고? 이것도 네가 꿈꾸고 바라고 선택한 일이라구! 


*  그래서 이제, 너는 어떻게 할건데.
검은 화면 위로 크레딧이 서서히 올라간다. 한참동안 눈을 떼지 못한 것은, 이제까지 이 영화를 맘 속에 품은 까닭은 아직 선택을 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용기를 내지 못한 까닭일까.  

 


*한가지 덧붙이자.
두 배우가 무척이나 탁월하게 연기를 했다는 진부한 감탄을 적지 않을 수 없다. 정말 최고였다. 갈등하는 소시민의 레오나르도는, 그동안 너무 무게잡아 드러나지 않았던 그의 진솔한 매력을 한껏 발산했고, 우아하지만 충분히 도발적인 케이트 윈슬렛은 <이터널 선샤인>의 캐릭터를 떠올리게 할만큼 매력적이었다. <더 리더>도 좋은 영화였지만, 케이트 윈슬렛은 이 영화로 상을 탔어야 했다. 케이트 윈슬렛이 시상식에서 상을 받으면서, "레오, 당신은 나에게 정말 특별한 사람이에요!"라며 사랑스러운 눈길을 보낼때, 괜히 흐뭇해지는 것은 무슨 심사일꼬. 이 커플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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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감독 산제이 릴라 반살리 (2005 / 인도)
출연 아미타브 밧찬, 라니 무커르지, 쉐나즈 파텔, 아예샤 카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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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버전 헬렌켈러다.
마치 <죽은시인의 사회>에서 걸어나온 듯한 혈기왕성한 사하이 선생님이 헬렌켈러인 미셸과 이루어내는 마법같은 이야기다.

예상대로 감동이 있고, 분명한 눈물점이 있다는 점이 큰 미덕이다. ('예상만큼'이라는 수식어는 결코 쉽게 붙일 수 없다는 걸 기억하자) 웬만해선 영화보고 눈물따윈 흘리지 않는 나도 미셸이 처음 선생님을 부를 땐 그만 안구에 촉촉한 습기를 느낄 수 있었다.

아마, 사하이 선생님이 미셸을 보고 울 때마다 함께 울게 될 것이다.

이런 기본 구조에 선생님과 제자 간의 미묘한 사랑 이야기가 헬렌켈러 스토리에 깊이를 더한다. 미셸의 흔들리는 내면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으리. 사하이 선생님의 교육을 받고 있으면 금세 선생님의 매력과 열정에 빠져들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사제지간에 흐르는 모호한 감정도 긴장감있게 잘 살렸다.

사하이는 알츠하이머 병에 걸리고 미셸에 대한 기억을 잃어간다. (이건 예고편에도 나오는 설정이다..)
사랑은 비록 이루어지지 않지만, 미셸과 사하이가 스승-제자 관계에서 제자- 스승의 관계로,
서로의 역할을 바꾸어 서로의 존재의 의미를 획득해과는 과정이 무척 인상적이다.
어느정도 억지스러운 부분이 있지만, 그 과정은 분명 목이 메이게 하는 감동을 갖고 있다.


이 영화는 헐리우드 영화처럼 잘 짜여져 있다.
하지만 발리우드 식으로 풀어냈으면 어떨까?
정밀하게 다듬어진 감동을 만나는 것도 재미있지만, 군데군데 할리우드적인 공식에 맞춰 진행되는 이야기는 긴장감을 떨어뜨린다. 발리우드 식으로, 조금은 거칠고 황당하더라도 더 자유롭게 이야기를 풀어냈다면, 더 생생하게 살아있는 미셸과 사하이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분명 감동은 있었지만, 조금은 심심하다고 느낀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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