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피트 닥터, 밥 피터슨 (2009 / 미국)
출연 이순재, 에드워드 애스너, 크리스토퍼 플러머, 조던 나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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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영화를 제일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내가 상징적으로 가지고 있는 - 그러니까 누가 물으면 이 영화 제목을 대야지- 영화 제목을 읊는다. 사실 그것은 내가 제일 좋아한다기보다 좋아하는 영화 중 일부다. 제각기의 남다른 가치와 매력을 뽐내는 좋은 영화가 많아 그 중에서 제일은 고르기 힘들다. 차라리 어느 감독의 제일 좋은 영화, 정도면 또 모르겠다.

 

또 어려운 질문은 제일 좋아하는 감독이 누구냐는 질문이다. 이것도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좋아하는 영화는 말할 수 있어도 좋아하는 감독을 말하는데는 꽤 오랜시간이 걸리는데, 일단 좋아하는 감독이 많긴 한데 그들의 모든 것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혹은 모든 영화를 보지 않았다는 것이 첫번째 이유. 두번째로는 내가 좋아하는 몇몇 감독들은 영화와 관계없는 그들의 영화 밖 모습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는 점이 두번째 이유. 결론적으로 이것 역시 무척이나 우러러보고 좋아하기 때문에 꼽기 어렵다. 멋진 사람(영화)들이 너무 많아서, 알면 알수록 더 멋진 사람(영화)들을 알게 된다. 그게 영화의 세계의 매력이다. 그래도 말이 나왔으니 답을 좀 내고 가자면,

 

최근에 개봉한 영화중에 가장 좋아하는 감독은? 당연 쿠엔틴 티란티노

최근에 가장 관심있는 감독은? 제인 캠피온, 스티븐 달드리

존경한다고 말하고 싶은 감독은? 스탠리 큐브릭

 

흠. 이런 식으로 나는 한시간 정도 계속 써내려갈 수도 있을 것 같다. 

 

최근에 친구와 "네가 좋아하는 영화 장르는 무엇이니"라는 질문을 하고 답을 준비하면서, 나는 특별히 좋아하는 장르는 없다고 말했고, 생각해왔는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이 점은 최근에 영화를 촬영하면서도 느낀 바 있어 몇자 적는다.

 

그러니까 누누히 나는 멜로를 만들고 싶어하는데도 불구, 자꾸 피가 낭자하고 죽음의 기운이 엄습한 스릴러 장르의 결과물에 다가간다는 것이다. 첫번째 영화야 기획자체가 그랬다-기보다도 그것 역시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자는 목표였는데, 그 재미가 스럴러적인 재미로 드러났다. 이제껏 내가 썼던 몇가지 시나리오에는 대부분 쫓는자와 쫓기는자가 등장하고 추격씬 혹은 한밤중에 범죄사건이 대부분 등장한다는 걸 알 수 있다. (호오)

  

그러니까 안하는 것은 의미이지만, 다르게 하고 싶은데 자꾸만 한쪽으로 쏠리는 것은, 이거 숨겨진 취향의 문제가 아닌가 싶은 것이다. 내가 자꾸 그렇게 만들고 있다는 것은, 그러한 것을 보고 싶다는 욕망의 발현이 아닐까? 그렇다면 왜 자꾸 그런 이야기를 만드는가? 나는 영화가 영화적이길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일상의 풍경을 담아 현실과 소통하는 영화도 좋지만, 나는 '이것이 영화다'는 걸 인식시켜주면서 시각적인 상상력을 극하게 밀어붙이는 데에 재미를 느낀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나는 그런 스릴러나 어두운 영화를 즐겨보는 편이 아니라는 것. 정말인가? 한번 살펴보자고 생각해봤는데....... 내가 최고로 치는 영화들, 이를테면 <메멘토> <파이트클럽> <괴물> <드레그미투헬>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흠=_-

 

 

이런 측면에서 최근에 본 세 편의 영화를 논해보자.

 

왜 취향의 문제를 들썩거렸는가하면, 사람들의 많은 추천을 받고 본 영화가 기대만큼 재밌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기대하지 않고 본 영화를 재미있게 봐서 이것이 취향의 문제인지 검토해보고 싶었다. 그랬더니, 역시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다. 그러므로 줄거리 생략, 취향따라 꽂힌 부분, 별로인 부분 톡톡 집어가며 되는대로 평하겠음을 미리 알려둔다.

 

 

첫 번째로, <업>을 보았다.

이건 몇몇의 지인이 입을 모아 "어떻게 이런 영화를 보지 않을 수 있느냐."라고 말했는데, 마치 그 말이 "네가 세상 사는 재미를 제대로 알고는 있느냐"처럼 들렸기 때문에, 일종의 의무감으로 챙겨본 영화다. 예상치 못한 장면은 프레드릭슨 할아버지의 유년부터 성장기까지 동화책 넘어가듯 그려진 부분이었다. 꽤 인상적이었다. 이런 걸 흔히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옛시절'이라고 표현하는데, 동시에 우리는 이렇게 과거를 회상할 때 "영화처럼 흘러갔다"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고로 나는 이러한 풍경이 꽤나 영화적이라고 생각한다. 고전적이지만, 어차피 영화란 인간의 삶을 그리고 있으므로. 대부분의 영화는 한 시점, 혹은 한 사건을 그리는데 골몰하지만 한 사람의 인생을 쭈욱 훑어주는 것- 그 사람이 영웅도 아닌 평범한 사람인데도 말이다-이 나에겐 때때로 감동을 준다. (워싱턴 포스트는 “신랄함과 우아함에 있어 채플린의 그것만큼 가치있다”라고 이 4분짜리 오프닝씬을 평하기도 했다.)

최근에 아시아나 단편영화제에서 <구멍>이라는 이스라엘 단편영화를 보았다. 5분짜리 짧은 영상인데, 늙으신 할머니가 깜깜한 눈을 껌벅거리시면서 바늘에 실을 꿰려고 한다. 그러다 겨우 들어가 바늘이 실을 타고 쭈욱 떨어지는 그 찰나, 할머니의 인생이 앨범처럼 지나간다. 그래, 나는 언제나 '이 사람이 그 사람이었고, 그 사람이 이렇게 되었다'는 변신 혹은 변화에 애착을 가지고 있다. 그건 참 짠한 풍경이다. 언제나 내 예전 사진을 돌아봤을 때 짠해지는 것마냥 말이다. 그래서 그것이 만화임에도 불구, 어린 프레드릭씨가 할아버지가 되는 짧은 찰나가 내게는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공간을 이동하는 연출이 눈에 띄었다. 다음에 꼭 써보고 싶은 효과인데, 인물에 포커스를 두고 배경만 바꾸어 공간을 이동하는 것이다. 이런 만화적인 연출이 무척이나 효율적이고 흥미로웠다. 그리고 뭐니뭐니해도 명장면은 집이 하늘 가득 매워버릴 풍선을 매달고 둥둥 떠오르는 장면일 것이다. 뭐랄까, 어디에도 부딪치지 않고 떠오르는 집을 보면서, 저거 어느정도 높이 올라가면 호흡하기 어려운거 아닐까,라며 프레드릭슨의 호흡기 걱정을 한 나에게서 동심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는 걸까? 하지만 나는 정말 진지하게 걱정이 되었다. 저 집이 떠오르다가 어딘가 부딪칠 텐데, 떠오를때 배수관 및 땅에 연결된 것들은 어떻게 되는거지? 집이 떨어지면 그 밑에 혹시 사람이 깔리는 건 아닐까? 뭐 이런...... 너무 상상력을 자극하는 만화라서 그런지 자꾸 산만한 생각이 들었다.

 

결정적인 것은 너무 명확한 기승전결 구조다. 그러니까 이런 게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게 나란 사람이란 것도 어쩔 수 없다. 그러니까 요즘 내 영화 취향을 여기에서 기대자. 나는 결말같지 않은, 갑자기 뚝 끊겨버린 듯한 결말. 영화가 끝나도 계속 주인공을 걱정하게 만드는 결말, 삶은 죽음과 같지 않기에, 영화역시 삶처럼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도 계속 이어질 것만 같은 결말에 끌린다. 러셀이 도요새를 구하러가야겠다고 말하는 순간, 똘똘말린 레드카펫이 눈앞에 쫙 펼쳐지듯이 선명해지는 결말 구조가 내 흥을 깨뜨렸다. 그 순간부터 조금 지루해졌다. 그나마 기억에 남는 장면은 영화의 끝부분, 할아버지와 노인이 코너에 앉아서 자동차 색깔 맞추기를 하고 있는 훈훈한 장면이다.

 

러셀의 얼굴이 고개를 돌릴 수 없을 만큼 귀엽고 앙증맞았고, 할아버지의 시종일관 "NO"가 랩처럼 흥미로웠던 점, 즉 캐릭터 구축에 있어서는 픽사와 디즈니만큼 매력적인 능력자들도 없다. 하지만 현실 바깥 - 이를테면 숲속이나 장난감 세계-에서의 일들이 환상적이고 상상적으로 처리되는 부분은 영화를 보며 의심없이 믿게 되지만, 현실적인 부분 - 그러니까 집이 풍선에 매달려 하늘에 떠올라 남미까지 간다-에서는 조금 설득력이 부족한게 아닌가 싶다.

 

나는 현실성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저 설득력있는 논리만을 기대한다. 그것이 영화의 재미다. 잘 구축된 상상력의 재미다. 외계인에게 침공당한 지구가 배경이다 하더라도 그 외계인이 왜 여기에 왔으며 어떻게 왔고, 뭘 어떻게 하면서 살아가는지가 논리적이라면 그것은 충분히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이런데에 비해 <업>은 좀 두루뭉술한 설정이 많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집이 떠오를 때 다른 건물과 부딪치지 않기 위해 풍선에 장치를 해두거나 ( GPS) 높이 솟아 오를때 호흡기를 쓴다거나. 이런 디테일이 있었다면 더욱 박장대소를 했을텐데! 하지만 캐릭터 부분에서만큼은 에니매이션이라는 장르를 뛰어넘는다는 것, 그러니까 더이상 캐릭터가 동화속에 나올법하지 않은, 길가다 우연히라도 마주칠 것만같은 캐릭터라는 것은 무척이나 흥미로웠다는 점을 다시한번 언급하며 맺는다.

 

 

 나머지 두편의 영화는 다음시간에..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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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나는 지금 무척 심심해서 글을 쓰기로 생각했다.

몇가지 쓰고 싶은 것들이 머릿속에 뒤엉켜있는데

 



지난주에는 추수감사절이었다.

우리 친척중에는 교회에서 일을 하시는 분이 계시는데, 추수감사절에는 일주일 내내 이어지는 새벽예배 때문에 출근시간이 훨씬 이르다. 그 교회는 우리 집 근처에 있다. 그리하여 그 친척분은 일주일동안 우리 집에 머무르셨다. 내동생과 나는 친척분의 방문을 무척이나 즐거워하는데 그 까닭은 이 친척분이 우리 남매가 치킨을 무척이나 즐겨먹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 지난주에는 치킨-피자-치킨-치킨의 경의로운 야식메뉴가 구성되었다. 

 
어제, 그러니까 월요일. 추수감사절이 지난 어제, 내동생은 일어나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벌써 가셨어?"

이말은 꼭 내게 이렇게 들렸다. Chicken is gone ...

(물론 우리 남매는 치킨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친척분을 사랑한다.)

 

어쨌거나, 놀라운 것은 바로 어제, 치킨이 없는 자리를 섭섭해하기도 전에, 아버지가 피자를 사오셨다는 것이다. 하여 우리는 "치킨-피자-치킨-치킨-피자"를 이을 수 있게 되었다. 어제 먹은 피자는 나의 경사스러운 일을 축하하기 위해 아버지가 특별히 귀가 길에 피자 가게에 들르신 것이다. (생뚱맞게도 내가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을 받게 되었다. 껄껄껄) 어쨌거나 내 친구 말에 의하면, 크리스마스때나 먹을 만한 비싼 피자를 한 주의 한판씩 먹어치운 나로써는 황홀하기 그지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래, 난 너를 정말 좋아하는 모양이야.

 

문득 먹는 것에 대해 글을 쓰고 싶어졌다. 개인적으로 피자랑 치킨은 그 어감이 상당이 모냥새빠진다고 생각한다. 치킨은 그렇다치고, pizza라는 외국어를 형상학적으로 보았을때, 문자 자체에서 피자의 이미지가 그려진다. p자를 닮은 판에서 둥그렇게 모양을 내고 그위에 토핑을 톡톡 올려놓고(i) 화로에 구워 바로 먹었을 때 z처럼 쭈욱 늘어나는 치즈들. 그리고 우리는 말한다.

 

"a~" 아, 맛있다.

 

이런 영어 표기에 비해 '피자'는 너무 가볍고 패스트푸드의 냄새가 너무 진하게 난다. 피자의 말랑말랑하고 쫀득쫀득함에 비해 이 단어는 펑퍼짐하게 퍼진 느낌이 심하게 든다. 이렇게 쓰고 나니 더욱 이런 생각이 든다. 그래, 난 너를 정말 좋아하는 모양이야.

 

사실 내가 딱히 가리는 음식은 세상에 딱 세가지가 있는데- 노란 슬라이스 치즈와 가지요리와 노오란 호박- 차라리 대부분의 음식을 잘 먹는다고 하는 편이 낫겠다. 실제로 무슨 음식을 제일 좋아하냐는 질문은 무척이나 당혹스럽다. 시시때때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슨 음식이든 '맛있는' 음식을 제일 좋아한다. 그래서 내가 제일 꺼리는 상황은, 아무 정보도 없이 어느 음식점에 찾아가야 하는데 마땅히 가고싶은 곳도 없을 때다.

 

 맛집에 대한 집착의 기원은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된다. 아마 중학생? 때부터 나는 나만의 맛집 정보 노트를 가지고 있었다. 때때로 친구들은 어느 동네에 떨어지면, 어디가 맛있냐고 전화를 걸어오기도 했다. 그러면 나는 그 노트를 휘리릭 넘기며 지역 정보를 전해준다. 이런 일이 꽤 오랫동안 진행되었는데, 언제나 정보력이 많은 나는 늘 그런 정보통이었던 것 같다. 맛집, 재밌는 곳, 가볼 만한 카페, 뭐 이런 것에 언제가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늘 모든 선택은 나로부터 정해졌는데, 대학교 2학년 때쯔음 나는 이런 지역정보지 역할에 흥미를 잃었다. 그래, 너무 오래 했다.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깜짝 놀랄만한 근사한 것들을 소개해주느라 나는 늘 그것을 알고 있어야 했고, 언제나 한시간짜리 예고편을 보고 두시간짜리 영화를 보러 들어간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가 '너를 배려하기 때문에 네가 좋아하는 곳, 네가 먹고싶어 하는 곳으로 가자'는 말에서 생뚱맞게 무책임감을 느끼는 까닭이다. 그래서 요즘은? 나의 오래된 베태랑 친구들을 만날 때는 한치의 의심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즐겁게 나가지만, 처음 만나는 사람이나 서로 기대없이 만나는 경우 습관처럼 나는 주변 검색을 하고 나가야 마음이 편하다. 이곳이 남도가 아니기 때문에, 서울의 아무 식당 문을 열었을때 기분좋게 먹고 나올 수 있는 곳이 10곳 중 세곳이 안될 것이라는게 개인적인 지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하나의 예외가 있다면, 피자만큼은 어디서 먹어도 맛있는 것 같다. 아무래도 나는 피자의 존재 자체를 사랑하는 모양이다. 물론 비쌀수록 맛있는게 피자이지만 나는 배고플 때 도서관앞에서 친구와 2500원을 모아서 사먹는 작은 피자도 맛있고, 체인점에서 먹는 호화로운 피자도 맛있고, 이탈리아 음식점에서 먹는 피자도 전부 맛있다. 물론 차등은 있지만, 언제나 좋은 기억 뿐이다.

 

내가 자주 가는 도서관 근처에는 백화점이 하나 있고 그 안에 리미니 레스토랑이 있다. 거기서 종이조각같이 얇아서, 한 손에 둘둘 말아 두 입에 넣고 싶은 피자를 파는데 그것이 며칠 전부터 계속 생각나는 거다. 이상하게 기회가 잘 안닿았다. 그런데 문득, 오늘 생각해보니 그것이 또 먹고 싶은 거다. 어째서 피자는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을까? 이건 연구대상이다.

 

많은 사람들은 외국에 나가면 음식 때문에 고생을 한다지만, 나는 한번도 외국에서 음식 때문에 고생을 해 본 적이 없다. 음식에 대한 적응력 만큼은 원어민수준이다. 아프리카에서 처음 아프리카식 저녁을 먹었을 때, 나는 정녕 이곳이 내 고향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을 했다. 평소에도 밥은 거의 안먹는 (그러니까 반찬만 먹는) 나는 밥 없는 생활이 충분히 가능했다. 고작해야 가끔 떡볶이 생각이 났을 뿐, 나는 밥 보다 좋아하는 빵과 고기의 나라에서 한번도 음식 때문에 슬펐던 적이 없었다. 아마 먹는 것 때문이라면, 평생 여기서 살아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중국은 어땠던가. 함께 갔던 사람들은 죄다 고추장에 멸치를 꺼내 밥을 먹을 때, 나는 중국인보다 더 맛있게 향신료 가득친 마파두부를 떠먹고, 베이징덕을 먹었다. 그 어떤 냄새나 맛도 두려웠던 적이 없었다. 아프리카에서 돌아왔을 때도 타조고기와 낙타술이 가장 그리웠다고 하면, 음, 너무 야만적인가. 하지만 미각 때문에 정말 고생했다. 가끔 가다 정말 아프리카 음식 냄새 혹은 맛이 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는 그립다는 생각보다 눈물이 먼저 난다. 마치 어떤 풍경보다도 그곳에서의 노랫가락, 선율 한 자락이 더 그리움을 자아내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나는 한가지 음식에 중독되면 그것이 질릴 때까지 먹곤 한다. 예전에 치기어리던 시절에는 그랬다. 크림 스파게티가 좋아서, 서울의 모든 스파게티를 접수해서 랭킹을 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만의 베스트를 갖게 된 후에 중단했는데, 지금은 그런 것에 별로 흥미는 없다. 다만 내가 가끔 그런 별난 짓을 할 때 엄마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 그래도 평생 그것만 먹고 살라고 하면 지겨울걸!" 하지만, 정말 그럴까. 아. 피자는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왜 갑자기 피자 타령인가 하면, 최근에 먹은 피자 생각과 먹고 싶은 피자 생각에 더해 오늘 굉장히 웃긴 장면을 맞닥뜨렸기 때문이다. '붕어빵'이라는 TV프로그램이었다. 아버지와 아들 둘이 나와 퀴즈를 푸는데 정은표씨 아들 정지웅군이 출연했다. 사회자가 이 아들에게 장래희망이 무엇이냐고 했더니, 녀석의 대답이 과관이었다.

 

"전 만화가가 되고 싶은데,

아빠가 우리모두 살 수 있다고 피자가 되래요."

 

 

 

우와, 난 진짜 멋진 말이라고 생각했다. 피자가 되라니!

마저 감격할 틈도 없이, 알고보니 피디라는 발음이 빠진 잇사이로 새어 피자가 된 것이었다. 한바탕 웃음이 터졌는데, 나는 곰곰히 피자가 된다는 게 뭘까 하고 생각했다. 만약 나같은 사람에게 피자가 된다는 꿈은 무척이나 근사한게 아닌가 싶은 것이다. 언제 먹어도 질리지 않고, 행복하게해주고, 아무말 없이도 웃게 만들어주는 것이랄까.

 
생각해보니 나는 한때 "~피자가 낫다"는 수사를 종종 쓰기도 했다. 이를테면, 너보다 피자가 낫다. 뭐 보다 피자가 낫겠다. 라는 식의 관용구랄까. 그러고보니 피자와 나의 인연이 깊구나. 

 하지만 피자는 너무 일상적?으로 먹는 음식이라서 뭐랄까 특별한 기분은 덜한 건 분명하다. 무슨 날이기때문에 피자를 일부러 먹는 일은 거의 없다. 나에게 피자는 아버지의 선물같은 것이다. 아버지가 사오시면 먹는날(사랑합니다) 나의 바람은 그저 가끔 먹는 피자를 주식처럼 먹고 싶다는 것일 뿐.

  

Good taste food maks me happy.

 

피자가 되래요, 에서 시작한 피자 타령이 길어졌다. 여름에도 좋아했지만, 겨울이 되니 따끈따끈한 국물과 탕이 더욱 반갑고, 먹는 풍경이 어쩐지 더욱 따뜻하고 훈훈하게 느껴져 괜히 기분이 좋다. 올 겨울에도 맛있는 풍경 속에 많이 담겼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도 피자같은 사람이 되어야 겠다고도 슬며시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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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

 

n.

 

 

 

 불합리한 노동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만드는 주문같은 추임새.

(예시_"네가 누나잖아")

 

 

 'ㄴ'이 두번이나 들어감으로써, 마치 무언가 한없이 퍼줄것만 같은,

모든 걸 이해해줄것만 같은 환상을 자아내게하는 명사.

 

 

이런 형상학적으로 따져봤을 때 '누나니까'라는 말이 지니는 이미지상의 폭격을 보라.

ㄴ이 3개에 마지막에 두개의 ㄴ이 뒤집혀져있는 저 단어는

보기만해도, 듣기만해도 과중한 부담감을 주고 있지 않은가!

 

 

순식간에 뿜어져나오는 아이돌 사랑에, 때때로 거침없이 찬물을 끼치는 정체성.

(예시_ "맞다.. 내가 니 '누나'지")

 

 

부르면 뛰어가고 싶은 사람: 유승호

부르면 도망가고 싶은 사람: 마이브라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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