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아. 글아. 글아.
이번 한주는 참으로 더디게 가는 구나.

글아, 글아, 글아.
나는 너를 사랑한다. 속살을 보여다오.

글쓰는 건 즐겁다. 글쓰는 건 즐겁다. 글쓰는 건 즐겁다.
글아, 나를 즐겁게 해다오.
함박 웃음을 짓고, 그 입꼬리를 한껏 올려 내가 가야할 방향을 가르켜다오.

글아, 오오, 나의 글아.
말갛게 솟은 글아.
나에게 네 진실을 말해다오.
내 가슴은 촛농처럼 타들어간다. 나를 너무 애태우게 하지 말아라.

너는 고독한 것이 아닐 터.
아무 말도 할 말이 없는 내가 이렇게 너를 어루만지고 있으니
컴퓨터 벽에 대고 외쳐도, 너는 저 지구 끝, 그 너머 아무말도 하고 있지 못하는
행성 B663445-490-03324호에까지 닿아라. 아무 메아리 없어도 내 알겠다.

글아, 글아, 글아.
참말 생이란 게 이런 것이구나.
아니, 이십대란 게 이런 것이구나. 너는 모른다. 글, 너는 모른다.
내가 내뱉기 전까지 너는 모른다.
그러니까 나를 달래라. 어루어라. 진실을 뱉게끔. 손끝을 어루어다오.

글아. 글아. 머리를 내 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독촉에 시달리리.
세시까지 전부 다 뱉어낼 수 있겠지.
글아, 훗날에, 너랑 나랑, 한잔 술이나 부딪자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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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이 다가오고, 슬슬 자꾸만 뭔가를 정리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아마 방정리나 책상정리는 아닐테고, 기억 혹은 생각 정리일거다. 이름하야 올해의 베스트, 혹은 워스트 키워드정도 뽑아주어야 하는 게 아닐는지. 이번 주 주말에 해야 할 일이 생겼고나.

 

출근하면서 문득 생각해보니, 나의 올해의 키워드는 중독이 아닐까 생각했다. 아주 많은 것들에 중독되어 있었고, 그 중독이 1월의 나를 12월의 나로 변화시켰다. 그 변화는 진보적인 것이기도 하고 때때로 중독의 상태에서 꼼짝도 못하게 붙들어 놓은 것이기도 하다.

 

중독을 제일 먼저 생각해낸 까닭은 커피 때문이었다. 아침에 모닝커피,라기보다는 도저히 뜰 수 없는 눈을 띄우기 위해 커피 한잔을 사러 가면서, 올해 얼마나 많은 돈과 시간을 커피와 함께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 없이는 안돼,를 몇번이나 외쳤고, 마셔야만 해,를 얼마나 주입했는지 곰곰히 생각해본다. 중독 맞다. 아마 ~ 없이는 안돼,(=행복하지 않아), 혹은 ~해야만 해,라는 생각을 가져다 준 것을 중독의 기준으로 봐도 되겠지. 응용하면 그가 있는 곳에 내가 없으면 안돼라고 자지러지던 사람중독을 들 수 있겠다. ‘중독과 관련된 올해의 인물로는 세 명 정도를 꼽을 수 있겠다. 그야말로 중독,이라는 고민을 하게 만든, 그리고 많은 것을 변화시킨, 중독의 힘, 동력이랄까,의 모 작가님이 대상감이고, 그 뒤로 노무현 전대통령님. 이때의 중독은 앞의 중독과는 다른 의미다. 그리움도 중독된다. 그리고 이국 땅에서 내 이름을 불러, 이곳에서 꽃이 되게 한 스튜어던트 뒤를 잇겠다. 길지는 않았지만, 강력한 중독이었다.

 

커피에 뒤를 잇는 중독거리는, (믿기지 않게도) 병맥주다. 그래, 올해는 좀 그랬다. 그리고 음악도 빼놓을 수 없다. 귀에 달고 살았으니까. 지금 즉흥적으로 생각나는 것은 이 정도이고, 이제 일을 해야 하므로 천천히 더 생각해봐야 되겠다.

 

 

 ----------------------------------------------------------------------------------------------

 

오늘은 또 하나의 경계선이다.

오늘을 기점으로, 그 전과 이후의 나는 좀, 다른 사람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만큼 오늘은, 어제와 같을 수 없는 날이다.

무사히 나아갈 수 있길. 겸손하게 기도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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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떠보니 월요일이다. 나의 황금 같은, 아니 순금 같은 주말은 모두 어디로 갔을꼬.

주말이 귀한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한 학기에 방학 기다리듯 주말이 기다려진다. 그러니까 이건, 평일의 일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 내 마음대로 꾸릴 수 있는 주말은 그 자체로 귀하고 기다려지는 것이다. 방학계획보다 더한 계획을 품고 주말을 맞지만, 주말은 마치 바람둥이 고약한 나쁜 남자처럼 내 곁에 온 듯 다가왔다 잡으려는 순간 이내 떠나간다. 그러니까 주말이라는 것이, 뭔가 계획한 걸 해야지, 하면 일요일 밤이라는 거다. 이런 우울이 중첩되면 월요병을 낳는 것이겠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예전 연** 시절의 월요병에 비할 바가 아니지, ) 아침에 오는 길에 이런 문구를 봤다. ‘재미에 관한 짧은 에세이였는데, 모 기자는 자신이 늘 재미를 추구하는 삶을 살지만, 휴일에 가장 많이 하는 일은 빈둥 빈둥이라는 거다. 티비보고 빈둥빈둥 낮잠 자고 빈둥빈둥. 그 역시 나처럼 밤이면 자괴감에 시달리지만, 결국 생각해보면 그것이 내가 가장 재미있게 쉰 휴식이고, 자신만의 휴식 법이 된다는 거다. 어쨌든 편했으니까. 주말에 뭔가 해야 한다는 압박감. 놀더라도 생산성 있게 놀아야 한다는 압박감은 평일의 업무적 마인드의 연장선일 뿐, 나의 몸은 철저히 원초적 본능에 맞게, 제 편한 대로 쉰다 이 말씀. 어쩐지 이 글에 내 휴일을 보상받은 것 같았다.

 

주말 내내 음악만 들었다,고 할 정도로 음악을 들었다. 신보 노라존스부터 그린데이, 켈리클락슨을 들었다. 따끈따끈하고 핫한 앨범. 거기서 그치지 못하고, 올해의 앨범을 검색하며 놀았더니 2시간, , 정말 올해에는 굉장한 앨범들의 각축전이었군, 감탄하며 리스닝하니 4시간이 또 훌쩍. 이런, 재미붙인 나는 작년의 베스트 앨범까지 손대기 시작하고, 말도 안 되는 해체 운운하지만, 정말 언제나 건재한 모습의 오아시스 음악을 들으니 옛 추억이 물씬 나고, 결국 레퍼토리 한번 모처럼 읊어볼까? 초기 명곡부터 줄 세워서 들으니, 이것 참 스타우트 한 병, 옛 추억을 따며 한 시간. 돈 룩백미 엥거, 스탠 바이미는 정말 명곡이야, 들을 때마다 울컥하니, 이거 이렇게 밤 열 두시가 되었더라. 혼자 듣기 아쉬울 정도여서 연말에는 친구들 불러 음악감상 겸 파티라도 할까 했지만, 딱히 롹 쏘울에 전율하는 친구는 떠오르지 않고, 함께 들으면 말을 하기 마련이고, 말을 하면 음악을 들을 수 없으니 지금이 행복하고나, 즐거운 마음으로 밤은 깊어가고, 그렇게 보람차고 즐거운 하루를 보냈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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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는 부정적인 것에 취약하다. 그에 비해 행복에 대해서는 꽤 견고하다. 행복한 일이 생기면, 한번도 아니고 두 번 이상 좋은 일이 겹친다면 순순히 기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에이, 운이 좋았어의 단계를 너머 행복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면, 필시 대부분의 사람은 환호성을 지름과 동시에 그 행복을 의심해본다. 한국에서 정규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교과서에 수록된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의 반전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아니, 종종 우리는 삶 속에서 인력거꾼 김첨지의 몸짓을 재현한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일이 잘 풀린다 했더니만.’

 

불행의 연속은 감히 그 끝을 상상할 수 없게끔 만들어버리는 데에 비해, 행복의 연속은 일찌감치 끝을 예상하고 불안을 만들어낸다. 그만큼 우리는 행복에 익숙하지 않다. 누구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지만, 행복은 마치 손가락을 벌리기만 하면 금방이라도 날아가버릴 것만 같은 잠자리 같고, 어쩌다 손아귀로 날아 들어온 한 마리의 나비 같기만 하다. 불행은 이불같이 일상을 잠식해버리는데, 행복은 흐릿한 일상 에 켜진 초처럼 존재한다. 때때로 우리는 기쁜 일이 한껏 포진 된 일상 속에서도 습관처럼 불행에 반응한다. 행복의 초가 빛을 뿜는 와중에도 바로 아래 고여있는 그림자, 검은 그을음에 마음을 빼앗겨버릴 때도 있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행복의 불안을 위안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우리는 지속된 기쁨보다는 낙담에 익숙해져 있는 모양이다.

 

몇 가지 즐거운 일 가운데 한 가지 근심이 생겼다. 내 하루를 100으로 보았을 때, 기쁨과 근심에 할당된 나의 감정은 몇으로 볼 수 있을까? 잠깐 기뻐하고 종일 걱정을 궁리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고 새삼스럽게 놀라웠다. 걱정이 그다지 심각한 것도 아니었거니와, 어쩐지 내가 습관적으로 걱정을 생각하기로 선택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최대한 행복으로 좌표를 맞춰두어도, 나침반이 항상 북쪽을 가리키듯이 금새 돌아보면 마음이 근심으로 기운다.

 

2

 

이럴 때 근심을 가장 빨리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문제 해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행동으로 사건을 변화시키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생각을 바꿔 부정하고 싶은 상황을 충분히 납득하는 것이다. 매일 밤잠을 뒤척이게 하지만 남에게 말하기 참 쑥스러운 고민을 살짝 언급하자면, 역시 지나친 팬심에 관한 문제다. 사람을 향한 넘치는 애정 탓이라고나 해둘까. 2주 전부터 나의 온 마음이 다음주에 있을 (나로서는 그야말로) 팬 미팅에 가있는데 그것과 관련하여 이런저런 상념이 든다. , 막상 적어놓으니까 과연 이것을 근심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의문이 든다. 과도한 설렘이 공황을 유발한달까. 어쨌거나 충분히 기뻐해야 할 현실을 누리기 위해 떨리는 심장을 멈출 수도 없고, 나름대로 해법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그런 중에 읽게 된 글이 있어 아래에 소개하고자 한다.

 

우리는 대부분 여리다. 그래서 사소한 변화도 우리에게는 중요해진다. 정말 그렇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리 좋은 시간도 결국 지나가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비단 나 뿐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 나와 함께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그리고 그것이 사라진다는 것을, 다시 반복되지 않는다는 것을 납득하는 것이 삶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 이 때문에 오늘이, 지금이 의미가 있는 것이겠지.

 

세상의 이치는 종종 틈새에 숨어있다. 매일 같이 반복되는 것만 같은 하루를 보내고 있지만, 삶을 잘 살아내기 위해서는 하루가 닫히고 열리는 그 틈새, 날씨가 맑아졌다 흐려지는 그 틈새에서 배워야 할 것들이 참 많다. 납득해야 할 것들이 참 많다. 그래서 네 근심은 해결 되었느냐구? 글쎄, 아무래도 직접 사건에 뛰어들어 행동한 뒤, 그것이 어찌되었건 삶이라는 범주 안에서 납득하면 되지 않을까. 그때까지는 근심 혹은 설렘이라는 이름으로 마음속을 좀 들썩 일수도 있겠지. 아래 글이 내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않았지만, 위안은 주었다.

 


3

 

김연수 작가의 칼럼이다. 그가 이제껏 써온 수많은 글들 가운데 내가 유독 아끼는 글이기도 하다. (그의 가정 생활이 살짝 엿볼 수 있어서 아끼고 그런 것은 절대 아니다.)

 

 

하늘을 힐끔 쳐다보는 것만으로

 

(…)다른 집과 비슷하게 우리 집에도 아이가 하나뿐이니 형제끼리의 그런 야단법석을 경험하기는 어렵다. 그래서인지 아이는 하루 종일 사촌들과 노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루 정도가 지나자 그 북적거림이 피곤해지기 시작한 나와는 달리 아이는 사촌들이 차를 타고 떠나는 그 순간까지 손을 놓지 않았다. 아이는 차에 오르는 사촌들에게 집에 가서 더 놀자고 말했다. 그런 아이에게 우리는 이제 인사를 하라고 권했다. 그 순간, 아이가 고개를 돌려버렸다. 아이는 끝내 인사를 하지 않았고, 자동차가 떠나자마자 엉엉 울어버렸다.

 

엉엉엉, 내 경험에 따르면 그럴 때 흘리는 눈물보다 가슴이 아픈 눈물은 없었다. 세상이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흘리는 눈물. 함께 있으면 너무나 좋을 것이 뻔한 사람들과 헤어질 때 흘리는 눈물. 왜 세상은 우리끼리 영원하게 행복할 수 없을까? 어릴 때 명절이 보내고 난 뒤 며칠 심각한 우울증에 걸릴 때면 나도 그런 의문을 느끼곤 했다. 나는 아이를 달랬다. 아무리 좋은 시간도 지나고 나면 사라진다는 사실을 납득해야만 하는 게 삶이라는 걸 설명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걸 무슨 수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아직 나도 제대로 납득하지 못하는데.

 

살아오면서 나도 여러 번 삶이 반복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상처를 받았다. 추억이 그 상처를 달래주는 힘이 있다고는 하지만, 순간의 경험만큼 생생하지는 못하다. 아무리 사진을 찍고 일기를 쓰고 비디오로 촬영해도 지나가고 나면 그 순간은 더 이상 내 것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삶에서 배워야만 하는 건 바로 이 순간이 지나가고 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납득하는 일이라고 나는 여러 번 생각한 적이 있었다.

 

물론 그걸 익히는 일은 정말 어렵다. 하지만 매일 나는 그 일을 익히려고 애쓴다. 나의 스승이라면 매일 변하는 날씨다. 화창했다가 또 흐리다가, 햇빛이 나오는가 싶으면 비가 내리고 어느새 계절이 바뀐다. 아침에 집에서 나오면 늘 하늘을 쳐다본다. 거기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늘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매일 변하는 날씨는 내게 살아있다는 것도 그와 같다고 말해준다. 그러므로 살아가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뿐이다. 그 날씨를 즐길 것인지, 아니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날씨를 탓할 것인지.

 

우리는 대부분 여리다. 그래서 사소한 변화도 우리에게는 중요해진다. 그런 변화에 맞서 여린 마음을 감춰두는 건 우리가 잘하는 짓이다. 하지만 그렇게 변화에 버티어보면 우리는 상처를 입게 된다. 이게 바로 내가 날씨에게서 배운 가장 단순한 진리다. 그러므로 나는 아침에 일어나 하늘을 볼 때마다 내가 참으로 변화에 여린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여리다는 건 내가 과거나 미래의 날씨 속에 살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나는 매순간 다른 날씨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나는 날마다 그날의 날씨를 맛보는, 일관성이 없는 사람이다.

 

다행이 우리는 원래 그렇게 태어난 모양이었다. 엉엉엉 울던 아이는 시간이 조금 지나자 울음을 그치고 뭘 하면서 놀까 궁리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집 근처 공원에 가서 오리를 구경하기로 했다. 호수에 사는 오리는 볼 수 있는 날도 있고, 볼 수 없는 날도 있었다. 과연 오리를 볼 수 있을지 없을지는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어쨌든 우리는 오리를 보러 공원까지 갈 수는 있었다. 오리는 한참 지나서야 물풀 사이에서 뭍으로 걸어 나왔다. 밤이 되면 오리는 다시 어딘가로 숨어들어 잠들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집에서 잠들 것이다. 그리고 아침에 깨어난다면 새로운 날이 시작됐음을 알게 될 것이다. 하늘을 힐끔 쳐다보는 것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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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나는, 말하는 것도 좋아하고 듣는것도 언제나 환영이다.
말이 통하는, 그러니까 감정과 느낌을 교류할 수 있는 친구와의 대화는 오브콜스, 언제 불러도 태평양까지 기꺼이 뛰어가고 싶을 따름. 하지만 누군가와는 그렇게 말하는게 즐겁고, 헤어지기가 아쉬워 발을 못떼고 꿈 속에까지 그릴 정도(!)인데, 반대의 경우도 있다. 그러니까, 느낌도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대화.

최근의 대화.

한 친구. 나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털어놓는다.
이말인즉슨, 해결은 본인이 할 수 있는데, 내가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으니 나로서는 해결 불가능한 일.
아무래도 들어주기만을 바라는 것 같은데, 이것도 참, 엄청난 강도와 시간은 견딜 수 있는데, 매일 매일 같은 문제를 들고 오는 건 곤란하다. 다른 건 다 참아도 지루한 건 못견디니까. 이 경우는, 통하지 않는, 말이 넘쳐서 문제.

또 한 친구. 글로 마음을 털어놓는데, 이 친구, 나 보란듯이 글을 써놓긴 하는데,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의중을 알 수가 없다. 어떻게 보면 긍정, 어떻게 보면 악,악담?... 대답을 필요로하지 않지만, 대답을 요구하고 있는 글. 혼잣말처럼 썼지만, 누가봐도 알만한 나에게 쓰는 글. 처음에는 머리도 굴리고 의중도 궁리하고 했지만, 점점 꼬여가는 심사대로 꼬여가는 글, 아, 답답하다! 이 사람아. 핵심을 말해! 이 경우는, 언어가 암호가 된, 고갈되어 갈증 뿐인 소통.


그래서, 12월도 되었고 마음을 추스르며, 에라이 나름 해결책을 강구했다.
그리고 책을 펼쳤는데, 황인숙의 <>이라는 시를 발견했다
.
뭐랄까,  갈증난 마음에 쩍,하고 강이 솟구치는 쾌감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나도, 강으로 가야겠다.




 

황인숙  <>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에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찬장에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장간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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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한 번 날려서 다시 쓰는 글.

문자 뒤로 숨는 것은 비겁하다. 언어는 분명한 목적성과 방향성을 지니지 않으면, 중요한 것을 말해줄 수 없다. 언어란 것이 애초부터 애둘러가는 특성이 있는데, 그러한 성질 뒤로 숨어버리면 좋은 소통은 불가능하다. 의지가 없는 사람과는 소통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지금 내가 운영하는 네이버 블로거가 그런 꼴. 일기장 같은 블로그의 속성 뒤로 안일하게 숨어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목적도 방향도 없는 글. 더군다나 내 글을 읽고 있는 한 사람을 의식하고 있으면서도 그와 무관한 혹은 어떤 면에서 상당히 관계가 있을 글, 정작 앞에서는 할 수 없는 얘기들을 보란듯이 올려두고 애두른 답변을 기대하고 있는 모양새라니. 이건, 아니다. 소통이 아니다. 그 독자 역시 힐끔힐끔 내 글을 읽고 자기 블로그에 가서 본심을 애둘러, 두번둘러, 세번 둘러 꽁꽁둘러 숨는 모양새라니. 정말, 소통은, 아니다. 차라리 단 한명이 들어온다고 해도 티스토리가 낫지. 이런 식이라면 더 이상의 글을 올리는 것도- 전체공개로 할 것이 아니라면- 무슨 의미인가? 일기장에나 쓰라.

 

그러므로, 나는, 12월달에는 네이버 블로그를 운영하지 않기로 한다대신 미투데이를 오픈할 계획이다.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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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책을 읽는 것일까?

예전에 독서는 취미가 될 수 없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부연 설명이 필요하겠지만, 아무것도 남지 않는 독서는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이를 테면 재미로 읽는 책은 킬링 타임일 뿐이고, 어떤 책을 읽었다고 해도 그것이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면 읽지 않은 만 못하다. (그 시간에 더 재미난 걸 못했으니까) 물론 책을 읽는다고 당장에 짠 하고 어떤 변화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때문에 시간을 두고 볼 일이긴 하지만 읽는 사람은 알 것이다. 지루하고 재미없는 것과는 상관없이 이 책이 어떤 식으로든 내 삶에 영향을 끼치겠구나 하는 예감. 언젠가 내가 이 책의 한 문장을 붙들게 되겠구나 싶은 직감.

 

학창시절, 어린 나이에도 불구 굉장한 독서량을 자랑하던 친구가 있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 친구는 책을 읽지 않은 녀석보다도 인성과 성격 면에서, 그야말로 꽝이었다. 남을 배려할 줄 모르고, 늘 관심받기만 바라던 친구였다. 아무리 책을 많이 읽어도 사람이 변할 수 없다면 독서란 참으로 시시한 것이라고 생각했더랬다.

 

그리고 오늘 문득 점심을 먹고 엘리베이터를 타러 올라오는 순간, 이와 같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렇다면 어제와 오늘의 나는 당연히 달라야 하고, 어제와 오늘의 말이 달라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저번 주와 이번 주, 이번 달과 다음 달은 말이다.

 

 

적어도 시시해지지는 말자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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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내 털옷의 실오라기라도 뽑아 어떻게 해서든 잇고 싶었던 말은 그쳤고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어슬렁 거리고
                                                                   알고 있던 일도 막상 닥치면 이렇게 데면데면데면

 

둘,

원하는 것을 갖지 못했을 때, 나는 안타까움을 토로하며, 그 분노를 어느 대상에 분출하면서 나도 모르게 불행을 택한다. 그런데 오늘 보니 현명한 어른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이렇게 말할 뿐이다.

 

,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죠.”

 

늘 정념의 세계에 빠져있는 나.

가끔은 좀 쿨해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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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이별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김형경 (푸른숲,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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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이별> 김형경에 따르면, 사람들은 흔히 자신이 표출하는 행위나 언어를 제대로 이해하는 경우는 드물고 그것은 때때로 오해되어있다. 책을 읽다 보니, 우리의 진심과 진정성은 무의식의 영역에 위치한 듯 한데, 그것은 대부분 의식 기제에 부딪쳐 고스란히 표출되기 어렵다. (과연 어떠한 인위적인 의식 (혹은 사회성)이 없는 사람 (그렇다면 자연에서 태어난 어린아이?)이라면 자신의 본심(이것과 본능은 어떻게 구별해야 할까?)이 그대로 표출될까?

 

아무것도 거침없이, 나도 인식하지 못하는 내 진심만으로 이루어진 나는 어떤 모습일까? 아마 사회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망나니 같겠지? 하지만 좀더 유쾌하고 매력적일 수도 있겠다. 어쩌면 요란한 진창 같을 지도 몰라!

 

그러므로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 혹은 짐작되는 행동(내가 나를 짐작하는 경우는 오해할 소지가 많다)은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한 꺼풀 벗겨 혹은 한층 더 깊은 내면에서 분석해봐야겠다.

 

너 왜 좋으니?

너 왜 슬프니?

너 왜 기쁘니?

너 왜 그렇게 생각하고

너 왜 이렇게 쓰니?

 

 

 

***오전 내내 오벤바하의 <쟈클린의 눈물>을 들었다. 썩 잘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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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커피만 석 잔을 마신 것 같다. 심지어 집에 가는 길에는 입에 물려 마시다 버리는 만행까지 저지를 정도니 말 다했다. 밤에 피곤한 몸을 뉘였는데 눈이 말똥말똥, 까진 아니고 금방 잠들지는 못했다. 그래서인지, 오늘 아침은 유난히 피곤하게 일어났다.

 

흰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자라

 

검은 속눈썹 한 올 한 올 돌멩이를 매달아 놓은 듯 눈이 감긴다... 낭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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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프로듀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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