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행. 1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히가시노 게이고 (태동출판사,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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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의 열혈 독자를 자부함에도 불구, 그의 대표작이라는 <백야행>은 쉽게 인연이 닿지 않았다. 보고싶을 땐 책을 구하지 못했고, 한번은 구했다가 끝까지 못읽고? 덮은 기억이 난다. 하지만, 영화<백야행> 소식이 들리고, 주연이 한석규-고수-손예진 라인이라니, (너무 맘에 들잖아!) 어떤 이야기인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백야행>을 다시 열었다.


19년전의 사건으로부터 시작한다. 사사가키 쥰조라는 형사의 시점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는 중반까지도 누가 주인공인지 알 수 없도록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주인공이 서서히 물밑에서 떠오르는 기분이랄까. 많은 사람의 목소리와 시점에서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는 가운데, 독자는 그 모든 이야기가 가리하라 료지 혹은 니시모토 유키오와 관계되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때의 전율이라니. 그 두 사람은 19년의 사건과 관계된 인물 둘이다. 료지는 19년전 살해된 기리하라 요스케의 아들이고, 유키오는 요스케의 정부로 추측되었던 후미요의 딸이다.

이야기보다 나를 매료시킨 것은, 이야기의 구성이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런 식이다. A와 B가 관계된 사건이 있다고 치자. 그렇다면 A가 B를 이야기해서 그 관계성을 직접 드러내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 A가 C를 언급하고, C가 자신의 이야기를 서술하는데에 B가 연류된 방식이다. 맙소사. 마치 막다른 길에서 예상치못한 적수를 만난 듯한 기분! 이야기 골목골목마다 놀라운 인물과 사건, 단서들이 독자를 이야기 속으로 빨아들인다. (일본어 이름이 많이 나와 헷갈리지만... 뭐 그정도 쯤은 감수할 수 있다!)


히가시노는 원래 구성을 잘 이용하는 작가다. (<악의>나 <회랑정 살인사건>에서의 충격을 떠올려보라!) 그는 구성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특히 <백야행>은 위에서 언급한 구성이, 주인공 두 사람의 관계를 드러내는데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 마치 태양처럼 고고하게 빛나(보이)는 여자 유키오. 어두운 곳에서 그 태양 주변을 늘 맴도는 검은 위성 료지. 이 두 사람은 소설 속에서 단 한번도 만나지 않는다. 하지만 시종일관 이어져있다. 그것은 때론 인물로, 때론 사건이나 소품(RK등)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야기 구성 역시 두 사람의 관계를 직접 언급하는 거의 없지만, 독자는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짙어지는 두 사람의 인연의 자국을 발견하게 된다.


"이상한 러브 스토리. 그러나 세상에는 이런 사랑도 있다."
이 책의 타이틀이다. 두 사람은 만나지도 않는데, 이게 어떻게 러브 스토리냐며 투덜거렸지만, 마지막 장을 넘겼을 때 남는 그 긴 여운이란. 어떻게 이런 사랑이 있을까 싶은 안타까움. 이해할 수 없을것만 같지만 그럴 수는 있을 것 같은 마음.
 

19년 전, 한사람의 욕망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상처받고 아프게 했나. (이건 결코 소설속의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료지와 유키오의 삶도 안쓰러웠지만, 그 둘에게서 뻗어나간 여러 인연장의 인물들을 생각하니 안타까웠다. 료지와 유키오 주변의 좋은 동료들. 사랑들. 좀 더 그들에게 사랑을 줄 수 있었던 그 사람들에게 료지와 유키오는 그저 상처를 주고 받는 것으로 일관할 뿐이었다. 그럴 수 밖에 없었지만, 그랬기 때문에 또 안타까웠다.


히가시노는 공대 출신 아니랄까봐 현란한 컴퓨터 지식 및 공학적 지식을 마음껏 뽐낸다. 그런 천재성을 매번 히가시노의 소설 속 악인들이 물려받는다. 그들은 대게 공학,수학 천재들이다. (용의자 X의 헌신, 레몬...) 그래서 늘, 저 똑똑한 머리를 좋은데 썼으면 쯧쯧, 싶게 만드는데 이 작품에서 료지 역시. 하지만 그들 앞에 놓인 비극을 상상하면 (비록 소설이지만) 정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마음이 먹먹해진다. 


P.S 책을 읽고 드라마도 챙겨보고 싶었는데, 영상으로 만나는 <백야행>의 후폭풍이 두려워(ㄷㄷㄷ) 감히 도전을 못하겠다. 어둠 속을 걷는 고수와 손예진. 그리고 그들을 추적하는 한석규! 어서 만나보고 싶다. 아마 이야기는 중간이 생략되고 처음과 끝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거기다가 인디 영화계의 히어로(!) 임지규군이 (역시) 도모히코로 출연한다는 소식! 미성숙된 소년, 용기는 없지만, 의리는 있는 도모히코! 정말 적역이다. 다카미야 마코토 역의 박성웅 배우도 맘에 든다.  부디 <백야행>의 아득하고 먹먹한 매력을 잘 살린 영화를 만날 수 있길. 


(출처: 아시아경제신문/티클로즈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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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영화는 지금, 현재 일어난 그 순간을 말하고 있어야 한다.
현재의 사건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결코 잊지 못할 영화가 될 것이다. 아시아나 국제단편영화제 순회상영전 P-1
(굳이 밝히자면..)스포일러 농후함

 

[까칠한 자매]★★★

결코 귀엽지 않은 두 늙은 자매가 바다에서 생선도 낚고 남자도 낚는다. 굵은 팔뚝으로 생선을 조리하는 장면이 그로테스크하게 표현된다.

이윽고 자매는 남자를 낚고 좋아서 어쩔 줄 모르고, 그를 잘 닦고 예쁜 옷을 입혀놓지만, 깨어난 남자는 기절 초풍을 하고 다시 바다속으로 뛰어든다. 결국 다시 시체로 발견된 남자. 생선과 같은 조리(자르고 굽고)를 당하고, 어딘가로 옮겨지는데. 자매의 티 타임. 남자 시체가 즐비한 다이닝 룸에서 자매는 로맨틱하게 차를 즐긴다. 그로테스크한 매력이 압권.

 



[스파이더]★★★★ 내쉬 어거튼 감독에 주연.

질은 화가 나있다. 옆좌석에 탄 잭은 질의 화를 풀어주려고 이런 저런 말을 걸지만 질의 반응은 싸하다. 곧 주유소에 도착하고, 잭은 편의점에 들어가 꽃과 귀여운 엽서, 초콜릿, 스파이더 모형을 산다.
 
주유를 하러 나간 질의 자리에 꽃으로 치장을 하고, 예쁜 엽서를 창에 붙이고 그녀의 반응을 기다리지만, 질은 대뜸 꽃과 엽서를 치우고 운전을 한다. 초콜릿을 하나씩 까서 그녀 옆에 두는 잭. 질은 결국 하나 입에 대면서 “이렇게 별 것 아닌 걸로 마음이 풀어지다니.”하면서 웃는다. 두 사람 모두 웃음을 짓는 따뜻한 풍경도 잠시. 질이 윗 거울을 열자 스파이더 모형이 튀어나온다. 옷속에 들어간 거미에 까무러치듯 놀라며 차를 세우고 밖으로 뛰쳐나가는 질. 갑자기 들이닥치는 차. 질은 멀찌감치 튀어 나간다.

당황한 잭. 곧이어 앰뷸런스가 오고, 응급처치를 한다. 두렵게 지켜보는 잭에게 말을 거는 구급대원들. 질에게 약을 투여하려고 그녀의 팔을 올리자 거미 모형이 튀어나온다. 깜짝 놀라 주사기를 든 팔을 번쩍 들어올리는 구급대원. 그 주사기에 눈을 찔려 고통스러워하는 잭.

스파이더 모형 하나로 벌어지는 사건이 무척이나 놀랍고 충격적이었다. 처음 여자가 사고나는 것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거기서 그치지 않고, 2차 연쇄사건까지 밀고나간 점이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억지스럽지 않았고, 짧은 시간동안 차 안에서의 긴장, 감정의 변화, 겨우 풀어졌을 때 닥치는 갑작스런 사고 등이 무척이나 극적으로 배치되었다. 아, 단편이란 이런 것! 무릎을 쳤던 작품이었다.

 


[색션 44]★★★★★ 다니엘 윌슨

집에서 나오자마자 남자는 수상한 사람들에게 납치를 당한다. 문 밖으로 나오는 남자에서부터 그가 밴에 실리고, 떠나는 밴의 모습까지 한 카메라의 shot으로 잡은 점이 인상적이었다. 벤에 이어 바로 하늘 위로 상승하고, 자연스럽게 다음 장면으로 넘어간다.

검은 배경. 환한 조명 때문에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는 남자는 심문을 당한다. 뭔지 몰라도 니 죄를 고백하라고 다그치는 남자 앞에서 항변하는 주인공. 안되겠군! 곧이어 주인공 옆으로 누군가가 다가와 뇌 전기 충격기라며 가져와 주인공의 머리에 연결한다. 한껏 겁을 먹은 주인공, 뭔진 모르겠지만 다 털어놓을게요! 아빠의 비리, 엄마의 위장전입, 자신은 여자친구의 동생과 종종 원나잇을 한다는 둥 정신을 놓고 떠들어대는 주인공.

갑자기 어둠속에서 그의 여자친구가 등장해 뺨을 후려갈기고 나간다. 뭐야, 이거 어떻게 된거야! 그 순간 환하게 밝아지는 공간. 서른번째 생일을 축하해. 자신의 생일파티장이다. 얼이 빠져 주인공을 바라보는 그의 가족들, 친구들. 하나씩 그곳에서 빠져나간다. 묶인 채 어처구니없이 앉아있는 남자. 조명이 꺼진다. 쓸쓸한 뒷모습.

불이 켜졌을 때의 당혹감이란! 불이 켜지는 순간, 우리는 주인공 만큼이나 뻘쭘해 질수밖에 없다. 이 점이 우수하다.

 


[하이브리드] ★★

유조차 운전하는 할아버지는 자꾸만 물을 마시고 생수병에 오줌을 싼다. 그와 동행하게 된 프랑스 남자. 둘의 기이한 조우. 마지막 장면, 프랑스 남자는 오줌이 차를 움직인다는 것을 알게 되고, 저쪽에서 차가 움직이지 않아 고생하는 여자를 발견한다. 그때 다가가는 남자 뒤로 생수병 서너개가 찰랑거리고 있는 장면- 굳이 말로 하지 않고, 장면만으로 설명해내는 방식이 좋았다.

 


[친애하는] ★★★★

애니메이션과 실사로 이루어진 다크 로맨스. 그 자체만으로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험프리 보가트, 잉그리드 버그만 등 영화 아이콘들에 대한 오마주가 무척이나 흥미롭게 결합되었다. 돈 때문에 추격을 당하는 남자. 여자에게 겨우 달려와 함께 떠나자고 말하지만, 여자는 표정을 바꾸고 남자를 죽이고 돈을 차지한다. 경찰이 올 것을 대비해, 남자를 토막내 조리 재료로 쓴다. 남자의 팔, 다리, 귀, 머리 등이 햄버거 재료로 요리된다. 인형으로 표현된 이 장면은 그간 내가 노래했던, 팔다리 잘리는 B급 무비를 어떻게 실현해내는지 보여준다. 씨쥐도 저리가라. 인형으로 해도 이렇게 끔찍한 비쥬얼이 나온다! (기.절.초.풍)

급기야 경찰이 들이닥치지만,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하고 돌아간다. 경찰 서장은 몰래 햄버거를 하나 훔쳐먹고 오는데, 돌아오는 길에 햄버거에서 수상한 물질을 발견, 다시 여자의 집으로 쳐들어간다. 작전실패. 정말 멋지다. 영화를 찍는데 한계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

 


[레슬링]★★ 동성애자 레슬링 선수 커플의 사랑이야기.

아이슬랜드 국민 스포츠인 레슬링을 연습하면서 비밀스런 관계를 유지하는 두 사람.

첫 장면에서, 앞에 누워있는 한 남자와 저 뒤쪽으로 보이는 또 한 남자의 맨 엉덩이 만으로 관계를 드러내는 장면이 탁월했다.

또 샤방하지 않은 캐릭터들로 동성애를 과장하지 않고도 캐릭터에게 애정이 갈 수 있게 한 점이 훌륭했다. 살짝 지루하긴 했지만, 마지막 장면, 헤어지기로 한 두 사람이 마지막 레슬링 연습을 하는 모습이 압권.

카메라는 계속 어깨 위만 비치고 팬한다. 두 사람의 표정만으로 둘이 지금 느끼고 있다는 것, 과연 아래에선 어떤 일이 벌어지길래, 주변의 놀람을 감추지 못하는 사람들의 반응만으로 드러내는 점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왜냐고 묻는다면] ★★★★★ 띠에리 부파르

시나리오의 대단한 승리. 한 전쟁터. 명령을 지령받고, 결단을 내리고 상황은 긴박하게 돌아간다.

알고보니 이 곳은 영화 촬영장. 영화 촬영을 전쟁터에 비유한 이 작품은 모든 영화인들을 위한 위로 시다. 모두가 목숨을 걸고 많은 사람이 온 힘을 다해 협동하는 모습들이 그야말로 심금을 울린다.

“영화 촬영장에 비할만한 것은 바로 전쟁터다” -브레송 “촬영장에서 친구, 애인, 가족, 건강을 잃은 적이 있는 모든 영화인에게 이 영화를 바칩니다.” 등등의 삽입되는 문구도 압권이다. 한참을 낄낄대고 웃었던 영화이자, 내가 먼저 찍지 못해서 아쉽기 그지 없었던 작품.

 


[스탑]★★★ 박재옥

6분짜리 흑백 단편영화

노모를 데리고 운전하는 대머리 영석. 장난치는 노모에 신경을 쓰다 역주행하는 트럭을 피하지 못하고 핸들을 꺽는다. 사고가 나는 순간 시계가 깨져 멈추게 되고, 순간 세상이 멈춰버린다.

이런 상황에서 노모를 구하려는 영석의 갸륵한 용기. 노모의 창문 올렸다 내렸다하는 장난이라든지 영석이 큰맘을 먹을 때, 잔 머리를 옮긴다거나, 마지막 씬에서 자유자재로 시간을 멈춰 이용하는 영석의 디테일 등이 절묘한 재미를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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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기의 ‘멋진하루’를 보고 나서, 문득 원작이 궁금해졌다. 옛 연인에게 빚을 갚으라고 찾아간 여자. 그리고 그 둘이 돈을 받으러 다니는 하루-라는 스토리가 참신하긴 했지만, 돈을 받으러 가는 과정이 조금 반복적이어서 영화는 긴장감이 떨어진 게 사실이다. 과연 그런 부분은 어떻게 표현되었고, 게다가 이 장편 영화의 원작은 단편이라고 해서 그녀의 책을 찾게 되었다.




책은 줄거리 위주로, 영화와 상당히 흡사했다. 영화에서 하정우가 그랬듯 작품 속에서도 도모로의 캐릭터는 무척이나 독특했다. 이것 참 사람이 좋은 걸까, 뭔가 모자란 걸까 싶은 도모로. 그를 둘러싼 알 수 없는 여성들. 반면에 그에게 순순히 돈을 내어주는 여성들. 그들을 보면서 유키에는 자신이 사귀었던 이 남자 도모로에 대해 다시 생각하기 시작한다. 내가 정말 이 남자를 알았던 것일까, 싶을 정도로.

 

이 작품의 미덕은 단순히 이 알 수 없는 남자의 캐릭터만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유키에가 보기에는 참 딱해 보이는, 저기서 돈 빌리고 여기 빚을 겨우 막는 도모로의 캐릭터와 삶을 이해할만한 여지를 준다는 것이다. 그에게 선뜻 돈을 빌려주는 여자들의 말에서. 도모로는 그런 사람이라고. 소유의 욕심이 없고, 넉넉할 때 나누고 없을 때 빌리는 것이 어렵지 않은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유키에가 새로 알듯이 관객도 도모로를 다시 알게 된다.


 



다이라 아스코는 독특한 감수성을 지닌 작가다.
이윤기의 최근 작품도 그녀의 단편을 또 한번 원작 삼아 진행되었다고 했다. 실제로 나머지 작품도 이 특유의 감수성이 넘쳐 흘렀다. 루저라서, 또 다른 루저를 위로하는데 머뭇거리는 사람들. 때로는 같은 처지이면서, 나는 아니겠지 자위하는 루저들. 그들 사이에는 묘한 동지감이 흐르고, 그들의 삶 자체가 서로에게 위로를 주는 형국이다. 이것이 변주된 여섯 개의 단편이 모아져 있는데, 묘한 매력이 있다.

 

특히 <멋진 하루>처럼 낯선 만남을 그려내는 데 익숙한 작가다.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낯선 처자에게 임종이 가까운 아버지의 딸 대역을 부탁하는 이야기 <애드리브 나이트>, 시어머니가 멋있어서 그 가족이 되고 싶어서 그의 아들과 결혼한 쓰키에. 그녀와 남편의 쿨하다못해 무심한 관계가 인상적이던 <해바라기 마트의 가구야 공주>, 학창시절 첫사랑을 만났지만, 무수한 성형수술로 자신을 못알아보는 그 앞에서 쿨한 척 깔깔대는 루이 이야기 <맛있는 물이 숨겨진 곳> 등 만남이 사건의 중요한 계기가 되곤 한다.

 

뿐만 아니라 <누군가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한 직장부하가 상사에게 고민 상담을 하면서 시작된다. 소노베를 임신시켜서 돈을 쥐어줬다. 참담하게 말하는 직장부하를 위로하는 도모아키. 하지만 그 역시 소노베에게 같은 식으로 돈을 준 상태다. 그런데 순진한 후배 겐타가 그녀를 사랑한다고 도모야키를 찾아왔다. 두 사람을 말리기로 작정한 도모야키.


이 이야기도 처음엔 이상한 사람같기만 한 소노베를 도모야키가 이해하게 되는 순간- 소노베를 찾아가 겐타는 안된다고 말하자, 소노베는 ‘자신도 두렵다며, 자기도 결코 쉬운 여자이고 쉽지 않다는’ 속 마음을 밝히는 순간- 소노베가 다른 사람처럼 보이는 순간이 독자의 감수성을 자극한다. 게다가 그녀를 쉽게 버리는 두 남자와 대조되어, 순정 100%로 등장하는 겐타의 사랑 역시 훈훈함을 더한다. 이 작품은 플롯이 좋다.


(맨 위의 사진과 비교해보면, 작가가 인물을 어떤 식으로 그리고,
어떤 이야기를 다루는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위로하는 이야기. 참 많지만, 일본 소설에서 만나게 되는 이러한 설정은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이 작품에 한정해서 분석해보자면, 등장인물들은 대게 루저라고 불릴 법한 직업-전화방, 마담 등-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도덕적인 신념만큼은 확고해서, 가끔 독자로서는 손발이 오그라드는 계몽적 대사를 외치지만, 종종 그것은 상대방 캐릭터를 감화시키는 기능을 한다. 이것은 단순히 위로의 말이 아니라 자신들의 신념을 외치는 것이기 때문에 분명 마음을 움직이는 구석이 있다. 좋은 직업군에 속한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루저다. 다들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지만-<온니유>의 나카하라- 오히려 자신보다 못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에게 결국 위로를 받는다. 때문에 심리 위주의 서술이 주를 이룬다. 그 점이 독자로 하여금 읽기 쉬우면서 캐릭터에 가깝게 다가가는 효과를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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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보고 싶은 영화를

우리가 직접 우리 힘으로

만들어내면 돼요! 함께 하면 되요.


삭제된 비디오 테잎을 다시 촬영하여, 스웨덴 버전으로 둔갑시켜 대여하는 제리와 마이크. 둘이 찍은 좋게말해 스웨덴판, 쉽게 말해 해적판 영상은 짧고도 어찌나 허접한지! 그야말로 장난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그런 영상이 인기가 폭발하여 다시 살아나는 비디오가게라니. 이건 정말 판타지가 아닌가. 어쩌면 그야말로 아마추어적인 판타지가 아닌가 기우 속에, 섣불리 미셸공드리 걱정을 하고 있는 나.


허나 미셸 공드리의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단순히 우리가 아는 영화를 스스로 리메이크함으로써 발생하는 재미를 보여주려고 한 것이 아니다. 어떻게 리메이크 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미셸은 영화에 대해 묻는다.
영화란 무엇인가. 영화란 무엇이어야 하는가. 



 



두 사람이 찍는 영화는 흥행에 흥행을 거듭, 결국 판이 커진 두 제작자는 여러 배우들을 기용하기 시작한다. 바로 대여점에 오는 손님들, 마을 사람들을 영화 속에 출연시킨다.
내가 참여하는 영화. 그것이야말로 그 어떤 영화보다도 재미있는 영화가 아닌가.


영화는 놀이다.
교육받은 사람들의, 혹은 지식이 있는 사람들만의 소유물, 도구가 아니다. 헐리우드의 엄청난 시각효과를 구경하고 있자면, 영화는 마치 특별한 사람들이 만드는 대단한 어떤 것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때로 마법처럼, 결과물은 볼 수 있지만 모두가 그 과정을 알 수는 없다. 마법처럼 마술사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만을 보고 시각적 체험을 하게 된다.  


하지만 때때로 그러한 대단한 영화들이 남기는 공허함.
트랜스포머와 같이 최고의 기술 영화를 보고 난 뒤의 허전함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어쩌면 바로 여기에 답이 있지 않을까. 영상 속에서 어느 순간 관객이 이탈되어버린 게 아닐까. 관객과의 교감을 놓쳐버렸기 때문에, 영상을 위한 영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영화의 감흥이 관객의 삶 속으로 비집고 들어오지 못한 게 아닐까. 잊지 못할 영화는 어떻게 해서든 보는 이의 삶의 한 면을 흔들어놓으니까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자신이 참여하는 영화는 최고로 좋은 영화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제리와 마이크는 저작권법이 들이대는 무시무시한 협박(65,000년의 형을 살아볼래?)에도 불구, 최후의, 최고의 작품을 제작하기에 이른다.
“마이크! 우리가 원하는 영화를 만들자!” 대부분의 감독 혹은 영화 관계자들이 이러한 과정으로 영화에 입문하지 않았을까. 이제는 내가 보고싶은 영화를 만들자! 잘 모르겠다고? 일단 해보자. 일단 만들어보는 것부터 시작하자. 


곳곳에서 드러나는 공드리의 재기 발랄한 아이디어들이 시종일관 웃음을 짓게 한다.
어떤 환경도 영화를 만드는데 방해물이 될 수 없다. 공드리가 영화 속 영화제작에서 보여주는 각종 노하우는 영화 그 자체보다 흥미롭다. 바닥에 붙은 파이프오르간 촬영, 유리총격씬, 하늘을 나는 자동차 등등. 특히 모두가 함께 스토리라인을 정하는 장면은 충격적일 정도로 굉장했다. 영화는 단체작업임에도 불구 그 내부를 구성하는 작업은 철저히 개인적이라고 생각했던 기존의 생각을 강하게 흔들어놓았다!





미셸의 영화치고 조금은 시시한 영화가 되지 않을까 싶었지만, 정말 기우였다. 결국 모두가 함께 만든 영화를 상영한다. 텔레비전이 부서지지만, 누군가 영사기를 들고 나타난다. 창문가에 흰 커튼을 달고 영화를 본다. 영화를 보는 사람들의 얼굴. (언제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 중에 한 장면이다. 사람들의 시선. 그 표정. 정말 아름답다. 게다가 소설 <상록수>에 버금가는 라스트 씬. 비디오가게 밖에서 모두가 함께 영화를 보고 있는 라스트씬은 정말이지 마음을 먹먹하게 한다. 미셸이 말하는 영화는, 그가 꿈꾸는 영화세계는 바로 이런 것이다.  


P.S. 미셸과 찰리카우프만이 헤어져서 상당히 섭섭하게 생각하는 1인,이었지만. 찰리에 비해 미셸은 제 길을 잘 걷고 있다. 므흣하다. 이런 그의 영화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열심히 합시다. 미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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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가 어땠느냐는
물음에 나는 연신 “무서웠다”만 연발하고 있다. 엄마 얘기를 보고 무서웠다니. 엽기적인, 괴상한 캐릭터도 아닌, 국민엄마위상을 지닌 배우 김혜자를 보고 무서웠다니, 사뭇 의아할 수도 있겠다. 그 무서움(‘무서움’이 두려움보다 원초적이고도 감각적인 표현인 듯 하다.)은 박찬욱 영화를 볼 때의 무서움과 또 다르다.  

<살인의 추억>과 <올드보이>의 두려움이 다른 지점에 있는 것처럼. 박찬욱의 <박쥐>를 보는 내내, 감독이 지닌 악동적 에너지가 분출되는 것을 느꼈다. <마더>의 에너지는 심연 속으로 깊숙히 파고든다. 현실 속에서 운없이 마주칠법한 장면들이 주는 불쾌함. 미심쩍음이 봉준호가 만들어내는 두려움의 원천이다. 괴물보다 뱀파이어보다 더 무서운 것은,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이니까. 
 




모자란 아들 도준. 아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며 돌보는 엄마 혜자. 어느날 도준이 살인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간다. 도준과의 관계에서는 모든 것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엄마이지만, 사회 속에서 엄마는 그저 힘없고 약한 여자일 뿐이다. 약자의 위기는 누구도 관심 갖지 않는다. 결국, 혜자는 스스로 범인을 찾아나선다.

혜자는 도준에게 그저 헌신적인 존재다. 영화는 일상적으로 갖고 있는 ‘엄마’의 모습에서부터 출발한다. 도준이 노상방뇨를 하는 모습까지 지켜보는 혜자는, 도준의 모든 것을 끌어안고자 한다. 
 


혹자는 이 모든 이야기가 아들의 복수라고도 한다. 모든 것이 도준의 시나리오라는 것이다. 오싹한 얘기지만, 캐릭터를 보았을 때, 도준이 그토록 치밀한 사람은 아니다. 도준은 바보스러운, 순진무구함을 가지고 있다. 가끔 너무나 새하얀 색이 섬뜩함을 주는 것처럼, 도준이 지닌 순진무구함은 의도치 않는 섬뜩함을 지니고 있다. 순진함이 절대악으로 돌아서는 충동적인 순간은 그다지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도준은 치밀하고 계산적이라기보다 본능적으로 행동하는 인간이다. 버스정류장에서도 스스럼없이 볼일을 보고, 자신을 ‘바보’라고 무시하는 사람들에게는 한치의 망설임 없이 덤벼든다. 이렇게 원시적인 동물 같은 ‘새끼’를 품어내기 위해서는 어미 역시 원시의 세계로 뛰어들 수 밖에 없다. 
 


도준의 충격적이고도 충동적인 행위 뒤에는 엄마가 있었다. ‘바보라고 무시하면 가만두지 마’ 엄마가 도준을 지키고자 가르친 습관이 결국 도준과 엄마의 사슬이 되었다. 영화를 보고나면, 과연 엄마가 도준을 지켜낸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엄마의 행위는 모두 도준을 위한 것이었지만, 결국 돌이켜보면, 그것은 도준에게 더 큰 상처를 주기도 했고, 그가 저지른 파멸의 행위의 단초가 되었다.

영화에서 엄마와 아들은 사회적인 관계 뿐 아니라, 그저 개인과 개인의 관계로도 그려진다. 때때로 혜자의 헌신은, 관계적인 의무처럼 느껴진다. 가장 가깝고 가장 아끼는 사이,가 모자관계의 일반적인 통념이고 그들은 그것을 지켜내고자 하지만, 결국 서로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는 것도 그들이다. 게다가 그 둘은 사실 그닥 서로에 대해 많이 알고 있지도 않다. 엄마의 맹목적인 보호는 그 둘의 관계를 좁히는 것이 아니라 더욱 균열을 만들어낸다.
점점 더 파괴되고 상처나는 두 관계가 명백히 눈에 보이면서도, ‘모자관계’라는, 그 둘을 구속하는 통념과 의미 속에서 그들은 마치 못 본 척 끌어안고 상처내기를 반복한다. 그 관계의 징글징글함을 명민하게 포착해낸다. 

 



봉준호 감독은 <살인의 추억>이후 봉테일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감독의 말로는 그 별명에 ‘갇혀있다’고 말한바 있다. 자신은 그다지 디테일에 집착하는 스타일이 아니라는 거다. 하지만 <마더>에서도 곳곳에 봉테일의 면모가 드러난다. 여기서 그 면모란, 단순히 병적인 꼼꼼함을 이르기보다는 상황과 환경에 대해 굉장히 감각적이라는 거다. 이를테면 경찰서에 처음 들어오는 혜자가 품에 한 가득 박카스를 들고 와 일일이 형사들에게 나눠주는 장면이라든지, 횟집에서 변호사에게 아부를 하는 혜자의 대화 등 아주 일상적인 상황에서의 핵심을 포착해 뒤틀거나 낯설게하는 탁월한 재주가 있다. 일상에 관심이 많고, 삶에 남다른 센스를 지니고 있는 봉테일 만의 색깔이 드러나는 것이다.

또한 김혜자의 연기는, 그것이 연기를 넘어 그녀가 마치 원래 그런 듯한 섬뜩함을 보여준다. 감독과 배우가 캐릭터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있었을 때만 가능한 장면들이 곳곳에 눈에 띈다. 뿐만 아니라 황영희, 신새벽등 연극배우들이 무게감 있는 조연으로 등장해, 낯선 느낌과 묵직한 연기력을 동시에 선보여 더욱 영화적 완성도를 높인다.  

이 영화의 에너지는 하강한다. 그것이 어디로 향해있든, 그 에너지는 역동적이고, 무척,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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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뱅이의 역습 - 10점
마쓰모토 하지메 지음, 김경원 옮김, 최규석 삽화/이루





가난뱅이의 역습 - 마쓰모토 하지메 지음, 김경원 옮김, 최규석 삽화/이루

마츠모토 형님이 말씀하신다!
"가난해서 못한다고? 그럼 공짜로 살아!"
기똥차게 재미있는 반란을 일으키며 공짜로 살아가는 법이라, 제목부터 기똥차다.

21세기를 살아가는 방법은 이제 스스로 연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시대는 바뀌었고, 사회구조는 갈수록 덜 유쾌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속은척 타협하고 살던대로 살다가는, 생명연장의 꿈은 이룰수 있을지 몰라도, 신나게 살기는 쉽지 않다.




사실, 가난뱅이 기술이랍시고, '집 얻는 법, 밥값절약, 옷구하기' 등의 방법은 무척 궁상맞은데가 있다. 때론 누군가가 나의 노숙생활로 불편을 감수해야 할 수도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본설정에 맞춰진 경제관념 등이라 조금은 비현실적이기도, 상당히 엉뚱하기도 한게 사실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마츠모토가 주장하고 있는 것은, 자치적인 새로운 공동체를 스스로 조직하라는 거다. 가난뱅이들은 특히나 혼자살 수 없다! 함께 살고, 함께 먹고, 함께 타야 가장 돈을 아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야 자유로운 미디어를 만들 수 있고, 거리를 휩쓰는 무적의 대작전을 펼칠 수 있는 거지!


자. 이제 우리 모여서, 가난뱅이 회의를 하자.
생각만해도 멋진 일들을 꾸준히 해온 마츠모토! 절로 형님소리가 난다. 그런데 과연 우리나라에서도 이만큼의 호응을 얻어낼 수 있을까?

반란이란, 축제란 어디 멀리 가서 참여하고 오는게 아니라, 지금 여기서 해내는 것이라고 그가 말한다. 함께 이런 꿈을 꿀 수 있는 동료들을 찾는게 중요하다. 그리고 놀더라도 이렇게 더 넓은 곳으로 접속할 수 있다면, 정말이지 그 어디라도 신나는 놀이터가 될 것이다.

비록 흉내는 내지 못할 지언정, "나도 뭔가 하고 싶은데요!" 그 자세로, 지금 여기서부터, 우리 함께 역습을 꿈꾸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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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을 잃은 여자, 신애는 아들과 함께 남편의 고향 밀양으로 내려온다. 신애의 과거는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자신을 모르는 곳에서 새로운 출발을 하고 싶다는 그녀를 보니 이전의 시간이 그녀에게 결코 녹록치 않은 모양이다. 허나 새로운 곳에서의 시간도 그녀는 버겁기만 하다. 이방인인 그녀를 둘러싼 소문이 그녀보다도 먼저 사람들에게 도착해 그녀는 졸지에 ‘불행한 여자’가 된다. 숨바꼭질을 좋아하는 아이는 갑작스럽게 납치되어 영영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어버렸다. 밀양이 시작되는 곳에서 만난 종찬. 그는 그녀의 시크릿 선샤인처럼, 그때부터 내내 그녀의 주변을 맴돈다.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신애가 어떤 과거를 지녔는지, 아이가 어쩌다 불의의 사고를 당했는지 이 영화는 관심이 없다. 그녀를 둘러싼 사건들은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다. 화면에 보이는 것은 오롯이 자그마한 신애의 몸뿐이다. 우리는 그녀의 반응을 통해서만 사건을 느끼고 알 수 있다. 이 영화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견딜 수 없는 고통에 빠진 그녀가, 이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영화는 불편하다. 관객으로서, 신애한테 감정이입 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신애는 낯선 캐릭터다. 이것은 감독의 계산이다. 이창동은 관객이 그녀를 “주관적으로 이입되는 것보다 한발 물러서서 보도록” 했다. 컷과 컷 사이에 그녀는 자세한 설명이 없이도 극단적인 감정을 오가는 여자다. 그녀는 자존심이 강하고, 생활력도 강하고, 무엇보다 의지가 강한 인물이다. 때문에 다른 여자와의 관계가 있던 남편이 자신만을 사랑했다고 굳게 믿을 수 있으며, 고통 가운데 단번에 종교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 그러하기 때문에, 자신의 믿음이 흔들렸을 때 철저하게 절규하고, 저항한다. 누구도 그녀 곁에 다가설 수 없다. 누구도 함부러 그녀의 고통을 이해하거나 위로할 수 없게 만든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위로하고 기도하고 가까이 다다가지만, 실제로 그녀의 가장 가까이 있는 인물은 매번 그녀의 몇 걸음 뒤에 머물러 있는 종찬이다.

 

두 번째 불편했던 영화는, 종교적인 부분이다. 기독교의 풍경이 그려지는 모습에 의구심을 품었다.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감독은 이런 풍경으로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 이창동 감독은 스스로 말하듯이 종교에, 혹은 타인에게 예의가 있는 사람이라고 느꼈다. 신애를 묘사하는 방식이나 교회 풍경의 묘사에 있어서 고민한 흔적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감독 코멘터리를 참고하시길) 적어도 대상을 두고 함부로 아는 척 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철저히 신애의 신체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어찌보면 자극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기독교 설정은 사실 하나의 배경에 그친다. 그것은 그저 위로하는 사람들의 풍경인데, 종교가 건네는 위로는 일반인이 건네는 그것보다 훨씬 적극적이다. 때때로 우리가 너무도 쉽게 건네는 위로의 풍경- 너를 이해한다고 쉽게 단정짓는 풍경을 극대화시킨 것을 기독교적인 설정으로 표현했다고 본다. 위로하려는 노력보다 앞서는 말은 때때로 소외를 낳는다. 신애 근처의 많은 사람들이 모두 신애를 위하지만, 신애는 늘 소외되어 있다. 신애 스스로도 자신의 내면과 화해하지 못하고, 애써 웃음을 지으며 스스로를 소외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감독은 그녀의 감정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극단에 치달은 그녀의 모습은 사뭇 공포영화를 보는 것만큼이나 무섭고 충격적이다. 하늘(신)에 저항하는 그녀의 작은 몸뚱아리는, 인간 존재의 한계에 부딪쳐 안간힘을 쓴다. 누구도 그녀의 고통에서 예외일 수 없고, 누구도 그녀를 위로하는 실체없는 손과 다름 아니다. 그러기에 관객은 주체이자 객체가 되고, 어느새 밀양이라는 세계 속 하나의 조연이 되어 그녀를 바라보는 듯한 몰입을 하게 된다.

 

내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겨우 용서를 베풀러갔더니, 그 죄인은 벌써 구원을 받고 평화 속에 놓여있다. 이 어처구니 없는 용서(그녀)와 용서(신)의 간극. 하늘과 땅의 거리만큼 벌어진 망망한 간극 속에 홀로 놓여진 작은 영혼. 그녀는 바람처럼, 때때로 작은 회오리처럼 흔들린다. 관객은 그런 그녀를 계속 본다. 우리는 타인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우리가 그녀의 고통을 지켜보는 것은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가? 감독은 왜 그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의 한 가운데로 관객을 몰아넣는가?

 



영화는 끝이 나도, 그녀의 삶은 그렇게 계속 될 것이다. 그녀는 때때로 눈을 치켜뜨며 하늘을 올려다 볼지도 모른다. 종찬은 계속 그렇게 머물기만 할지도 모른다. 영화는 끝날 때까지 그녀의 삶에 어떠한 변화도 구원도 주지 않는다. 하지만, 희망이라고 하기엔 무척이나 미미하지만, 그녀가 마지막 장면에서 웃는다. 양복가게 주인여자와 평상시처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앞에서도 충분히 나누던 일상적으로 나누는 안부임에도 불구,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 나는 주인여자가 그녀에게 “병원에서 잘 먹고 잘 쉬었나베”하며 툭 말을 꺼냈다 얼른 살짝 ‘아차 잘못말했다’하며 고개를 돌려 입을 가리는 장면. 그 모습을 보고 터덜 웃음을 터뜨리는 신애.

 




함께 웃는 두 사람 장면에서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살아갈 수 있겠다. 타인의 고통에 섣부른 위로가 아니라, 작은, 아주 작은- 입을 가리고 실수를 용인하는 정도라도- 배려가 있다면, 당신과 나는 함께 웃을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은 결코 아픔을 치유해주지는 못하지만, 그 아픔도 삶의 한 조각처럼, 내리쬐는 햇볕처럼 그대로 품고, 한번 웃어주고 우리는 그렇게 계속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너를 이해할 수 있다는 만용, 덜 불행한 내가 더 불행한 너를 위로해주겠다는 무의식적인 만용에 한번만이라도 의심을 품을 수 있다면, 한번만이라도 그것이 상대를 소외시킬 수 있다고 배려할 수 있다면, 적어도 우리는 이렇게 함께 살아갈 수 있는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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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주교 암살이라는 임무를 마치고 난 레이에게 보스는, 2주간 벨기에의 관광도시 브리주에 가 있으라는 명령을 내린다. 함께 떠나있으라는 명령을 받은 켄은 브리주의 자연풍경과 예술미 넘치는 도시 관광을 즐기지만, 입만 열면 욕이요 불평인 레이는 모든 것이 지루하기 짝이없다. 이윽고 레이는 영화촬영장에서 만난 미녀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켄은 자신만의 즐거움에 탐닉하는, 평안한 시간을 보낸다. 그것도 잠시. 캔은 보스인 해리의 연락을 받는다. 바로 임무 수행 중 실수로 아이를 죽인 해리를 처벌하라는 것.

2인자 캔은 보스의 명을 따라 공원에 있는 레이의 뒤통수를 총으로 겨누지만, 그때 레이 역시 자신의 머리를 스스로 겨눈다. 아이를 죽였다는 자책감에 본인 역시 자살을 시도한 것이다. 이 순간, 그러니까 캔이 해리의 명령을 무시하고, 레이를 설득하여 떠나 보내는 순간, 순조롭게 흘러가던 모든 이들의 일상과 브리주라는 공간이 어긋나기 시작한다.  

 

 

모든 것은 원칙을 어기는 순간에 촉발된 것이다. 레이가 임무에 없었던 아이를-고의든 실수든-죽였기 때문에, 캔이 죽여야하는 레이를 살려보냈기 때문에, 호텔방에만 있으라는 명령을 어기고 레이가 여자와 사랑에 빠졌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그리고 원칙을 만든 자-보스-는 이 모든 어긋난 일들을 심판하러 브리주로 날아온다. (해리는 바로 <더 리더>의 훈훈한 남자 랄프 파인즈다! 짧은 머리에 야윈 얼굴로, 냉혹한 인상의 킬러를 만들어냈다!) 



정말이지 그들은, 킬러라고 치기엔 이상하단 말이지. 그들은 원칙주의자고, 도덕을 중시 생각한다. 임무로 자행하는 살인과 범죄는 도덕 예외로 적용된다. 그것은 일이기 때문이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쉽게도 죽이는 킬러 주제에, 실수로 저지른 아이의 죽음 앞에서 자살을 시도할 정도다. 또한 보스는 그 때문에 자신의 부하를 처단하려고까지 한다. 이게 웬 아이러니란 말인가.

이렇게 원칙적인 킬러들 앞에 놓인 세상은 결코 원칙적이지 않다. 우연과 무계획적이고 뜻하지 않았던 일들이, (일들만이!) 이들의 예상과 계획을 보기 좋게 비웃는다. 그 때문에 이들은 충돌을 일으킨다. 레이는 죽고자 할땐 살고, 살고자 할땐 죽는다. 캔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레이를 떠나보내고 싶어하지만, 레이는 어쩔 수 없이 돌아오게 된다. 해리는 자신의 원칙을 완수함으로써 고고한 킬러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지만, 그 역시 끊임없는 우연에 휘말려 레이와 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킬러들의 도시>가 흥미로웠던 지점은, 이 원칙주의자들- 고결한 삶을 살아내고 싶어하는-앞에 놓인 세상 속 우연의 풍경이다. 여기에서의 우연은 헐리우드 영화들의 그것과는 다르다. 하필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든지, 뻔히 예상되는 우연을 남발한다는 식 등의 쉬운 아이러니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모든 일에 원인과 결과가 있다. 이를 테면, 레이가 다시 브리주로 돌아오는 것을 보자. 우연히 해리에게 붙들린 것도 아니다. 마음이 바뀐 것도 아니다. 참 레이다운 이유다. 전날 여자의 집에서 그의 옛 애인을 때린 이유로,(이것 역시 레이에게는 어쩔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는 떠나는 기차에서 붙들려 돌아오게 된다. 레이의 모든 행동과 수다스러운 말이 그의 죽음의 원인이 된다.  

 



이 영화를 보고 숭고미를 떠올린 까닭은, 바로 이들이 고결한 삶을 살고자 하는 킬러들이기 때문이다. <킬러들의 수다>라고 제목을 헷갈려도 무방할 정도로 영화 속 세 명의 킬러들은 끊임없이 대화를 한다. 물론 말은 그다지 통하지 않는다. “너는 네 삶을 고쳐나갈 수 있어!”라는 켄의 말에 “그럼 의사가 되라구요? 시험봐야 되잖아요!” 레이는 이런 식으로밖에 대꾸할 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언제나 원칙을 염두에 두고, 그것에 대해 대화한다. 때문에 다른 영화에서 볼 수 없는 킬러들의 모습들이 포착된다.

캔과 레이가 미술관에서 종교화를 보며 죽음에 대해 논하는 모습을 보라. 이들은 죽음 자체보다 그들이 살며 저지른 죄를 두려워하고 있다. 죄를 인식하고 죽음, 끝을 인식한다. 숙소(BnB)에서 해리와 레이의 대결장면은 어떤가. 숙소 주인이 임신을 하고 있기 때문에, 밖에서 싸우자고 한다. 레이가 창밖으로 뛰어내리고, 해리는 문밖으로 뛰어나갈 것. 서로 정한 원칙을 위배하는 일은 결코 없다. 적어도 레이의 적인 해리는 반칙으로 레이를 공격할 것 같지만, 그들은 충실하게 약속을 행한다. 그들은 약속과 원칙을 지키는 고결함을 무엇보다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숭고함이란, 자신의 존재가 광대한 우주 속에 하찮음을 깨닫는 것이다. 자신의 하찮고 사소한 감정, 욕망, 의지를 내려놓는 순간 더 큰 질서와 자연세계를 발견하는 것이다. 자신의 욕망과 바라는 것 너머의 원칙을 목숨만큼이나 지키려고 하는 이들의 모습에서 고결한 삶에 대한 갈망(혹은 강박)을 느꼈고, 과대 해석해서 나는 그만, 숭고한 아름다움까지 느껴버린 것이다. 그들의 죽음, 혹은 집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나약한 인간인 그들이 지닌 의지와 신념에 관한 감동이다. 우연의 세상속에서 그것을 지켜나가고자 하는 그들의 고투에 대한 감동이다.

결국, 세 사람은 모두 죽는다. 세 사람 모두에게 살 기회가 있었지만, 그들은 그 기회를 선택하지 않았다. 끝까지 원칙 때문에 죽임을 당하고, 희생하고, 스스로 죽고 말았다. 이 어처구니없는 마지막 장면에서 허무의 감정을 느끼려는 찰나, 어쩌면 그들은 고결한 삶을 지키기 위해, 어쩌면 집착한 나머지 죽을 수밖에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브리주의 이 세 명의 킬러들은 그래서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 아름다운 브리주에서. 시간을 고수하듯, 변함없이 과거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예술의 도시 브리주에서 말이다.   

여기서 레이는 콜린 파렐이다. 가장 없어보이는 킬러를 기막히게 연기해냈다. '이런,진상!'이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끔 하는 특유의 블랙코미디스러운(?)연기는 골든글로브도 인정했다. 그는 이 영화로 골든글러브 남우주연상을 타냈다. (브랜단 글리슨, 랄프라인즈의 연기도 물론 좋았지만!) 충분히 그럴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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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짝, 스포일러 있음)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을 시험하는 서바이벌 게임.

이미 결론은 나왔다. 우리편은 일곱명이나 되고, 저쪽의 적수는 단 두명인데, 모두 당한다? 죄수의 딜레마처럼, 모두가 살고 싶지만, 결국 한명씩 죽어나가게 되어있다. 아무리 협동하려고 해도 협동할 수 없는 상황, 스스로를 잃어버리면서 혼란의 빠져가는 사람들. 그 혼란 속에서 멈출 수 없는 게임은 계속된다. 

왜 게임을 그만 둘 수 없는가? 

어째서 처음부터 그것이 단순한 게임이 아니었음을 알고,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을 알고도 게임을 게속 진행했는가?  시작은 게임이었지만, 단번에 이것이 단순한 놀이가 아님을 깨달은 참가자들에게 그 다음 게임은 더이상 게임이 아니게 된다. 이 곳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서바이벌 미션 자체가 게임이 되면서 참가자들은 이 게임을 계속 진행하는 것만이, 게임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결국 이 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사람은 단 한명 뿐이다. 이 게임의 룰은 서서히 참가자들 스스로를 조여온다. 그들은 모두가 함께 빠져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최후의 1인은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모순의 상황에 빠진다.  




장 PD의 계략대로 흘러가는 이야기는, 인간의 욕망과 그 반응이 무척이나 단순화되어 그려져있다. 아무리 패닉 상태라 하더라도 캐릭터의 일관성을 고려하지 않은채 쉽게 돌변하고, 쉽게 변화하는 인물상은 몰입을 방해했다. 인물들의 변화가 변화로 느껴지지 않고, 단순히 '미쳐간다'는 설명으로 그치는 것이 가장 아쉬운 점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야말로 비정상 캐릭터인 장PD가 지니고 있던, 마지막에서야 밝혀지는 그의 비밀이 인상적이었다. 그의 이러한 기이한 행위의 비밀이 과거의 한 사건에 연관되어 있고, 그 사건에 대한 복수라는 것이다. 그 사건은, 범죄 현장을 보고도 모른척했던 사회적인 무관심, 자신의 안위만을 염려해 모른척한 일반 사람들에 대한 분노다. (물론 여기에서도 여러명의 인물에게 노출시키기 위해 여자를 이리저리 끌고다닌 점은 너무나 인위적이다.-_-!!!) 타인에 대한 무관심에의 분노라면 사실 그 누구라도 마음이 무겁지 않은자가 없을 것이다. 물론 영화에서는 극단적으로 표현해놓았지만, 곰곰히 장PD의 심기를 헤아려보면 그러하다. 



그러니까, 이런 미친 게임을 벌인 박휘순이 그저 또라이로 밝혀지고 끝나면 시시해지는 것인데, 장PD의 그러한 사연과 그의 분노가 조금은 공감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범죄 현장에서 묵인했던 사람들에 대한 분노. 하지만 과연 그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는 어떻게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타자로 그 자리에 있었다면, 이러한 책임을 그 역시 피할 수 있었을까? (있지, 우린 누구나 겁에 질려서 살아간단 말이야.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문제이고, 부디 이 영화를 본 누군가가 '나는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다면 충분히 성공했다고 기꺼이 말할 수 있겠다.

 또 하나 덧붙여, 장PD가 선택한 최후와 신민아만 유일하게 살아나 '무사엔딩'을 맞는 것에 대해 아마 적지 않은 관객들이 공감하지 못했을 거라는 우려가 들었다. 그나마 그녀가 게임 중간중간에 인간미를 보여주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마지막에 살아남는 사실에 설득력을 더하기 위해 인간미를 노출한 것일까?...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알고보니 본성이) 착한 사람이라 좋은 결말이다- 라고 한다면, 이거 조금은 김 새는 결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덧붙여.. 아마도 현장 스틸. 요즘엔 이런 사진이 더 재밌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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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기 위해서

꿈. 어쩌면 꿈이라는 말은 조금 거창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보다는 열망, 바람이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외딴 방 하나를 가지고 있다. 외딴방은 잠시, 꿈꾸는 동안 머무는 곳이다. 때로는 외딴방에 있기 때문에 꿈을 갖게 되는 경우도 있다. 작가가 되고 싶었던 나, 사진사가 되고 싶었던 외사촌. 외딴방 밖에서 보이는 그들은 그저 모여 있는 익명의 무리지만, 외딴방 안에 웅크리고 있는 그들 개인은 우주를 품고 있는 숭고한 존재들이다. 꿈을 안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숭고하기 때문이다.

그가 소설을 써 보는게 어떻겠냐는 말 대신 시를 써보는게 어떻겠느냐고 했으면, 나는 시인을 꿈꾸었을 것이다. 그랬었다. 나는 꿈이 필요했었다. 내가 학교에 가기 위해서, 큰 오빠의 가발을 담담하게 빗질하기 위해서, 공장 굴뚝의 연기도 참아낼 수 있기 위해서, 살아가기 위해서. 

시골에서, 이제껏 살아온 방식으로 그렇게 어른이 될 수도 있었다. 외딴방에 살게 되는 인물들은 기존에 머물던 세계를 넘어 새로운 세계 속으로 뛰어들고자 외딴방에 기거하게 된다. 새로운 삶을 마주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세계와 새로운 세계 사이에 놓인 그 외딴방을 거쳐야만 한다.

나 역시 대학시절, 머물렀던 나의 작은방, 그 외딴방이 떠올랐다. 어제나 오늘보다는 내일을 생각했을 때야 겨우 잠들곤 했던 곳. 종이위에 연필로 긁적이고, 몸을 긁적이고, 그 좁은 방에서 흘러가는 내 시간을 긁적이던 지난날들이 소설을 읽는 동안 잠잠히 떠올랐다.


다른 삶을 꿈꾸는 자들의 외딴방
집과 학교의 거리가 멀었던 나는 학교 앞 고시원에 머물렀던 적이 있다.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던 나, 어떻게든 달라지고 싶었던 나...... 하지만 할 줄 아는 것은 별로 없었던 나. 그런 내가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나 스스로에게 좀더 -무언가 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일이었다.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내 통장을 털어서까지 고집을 피워 집밖으로 나온 것은 그만큼 그때의 나는 간절했기 때문이었다. 사회에 뛰어들기 직전의 일 년이었고, 공부할 수 있는 일 년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이전의 나와는 다른 삶을 살고 싶었다. 열여섯의...... 그 소녀처럼.

정말 좁은 방, 겨우 두 발을 책장 서랍에 넣어야 바로 누울 수 있었던 나의 방. <외딴방>속 작가의 시간과 공간과 나의 외딴방은 물론 너무도 다르겠지만, 열망으로 가득 찬, 지금보다 어린 내가 머물렀던 좁은 방을 추억했을 때 환기되는 감상은, 저자의 외딴방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으리라. 그곳에 늘 열망하는 일로 시간을 보내던 나, 외딴방에 갇혀 있는 게 싫어 늦도록 방밖에서 헤매던 나, 하루빨리 더 떳떳한 모습으로 외딴방을 벗어나고자 어느 때보다 열심히 공부하는 스물 네 살의 내가, 거기 있었다.

<외딴방>을 열자, 그때 그 방의 문, 301호실의 좁은 고시원의 문이 동시에 열렸다.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며, 가장 마음에 들고 내 사정에 꼭 맞는 외딴방을 구하러 다니던 기억, 그 외딴방을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두려움과 설렘. 첫날, 한 달, 백일을 달력 위에 표시하며 이 공간속에서 불어나는 시간을 고스란히 느끼던 시간들. 잊고 있던 기억의 포문이 열렸다. 그랬기에 열여섯의, 그 소녀가 머물렀던 외딴방, 느꼈던 외딴방이 내게 촉각적으로, 후각적으로, 시각적으로....... 생생하게 다가왔다.


열망이 끌어 넘치는 좁은 방
두 소녀의 열망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던 곳, 좁은 외딴방의 후텁지근한 열기가 훅, 느껴졌다. 지금이 여름이기 때문일까. 연탄불의 온기로 뎁혀지고 있는 방, 옴짝거릴 때마다 서로의 팔을 스칠 정도로 다닥다닥 붙어 누워있는 외사촌, 오빠 둘, 그리고 나. 그 모습이 자꾸만 눈에 어른거린다.

돌아누운 등, 웅크리고 있는 작은 몸, 그들이 누운 맨 바닥에서 피어오르는 제각각의 열망들이 천장까지 닿았으리라. 누가 뒤만 봐주면, 정말 열심히 공부할 수 있었을 큰오빠. 맏이란 이유로 동생들을 돌봐야 하는 천형을 어깨에 맨 큰오빠. 그를 보며, 왜 난 그의 누이가 아니었을까 미안한 마음을 갖는 나, 작가를 꿈꾸는 나, 그저 그렇게 풀어냄으로써 살아갈 수 있는 나, 어서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은 외사촌, 자신의 운명도 버거운데 시대의 운명과 맞서고 있는 작은오빠. 인생이 의도하는 방향으로 선뜻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는 그들의 밤이, 느껴진다. 마음이 금세, 눅눅해진다.

외딴방은 과거, 기억 속에 있다. 그 기억, 내 마음 속에 저 스스로 외딴방이 되어 머무는 상처 같은 기억이다. 소설 속 신 작가에게 외딴방은 그러한 존재다. 외딴방에 창을 뚫고 신 작가는 들여다본다. 그가 쓴 글이 외딴방에 문을 낸다. 사람들이 두드린다. 옛 친구 하계숙이, 큰오빠가, 잡지사의 기자들이. 결국 이 소설은 신 작가가 외딴방에 달린 문을 여는 과정이다.    

외딴방으로 걸어 들어간 건 열여섯이었고, 그곳에서 뛰어나온 건 열아홉이었다.  
그 사 년의 삶과 나는 좀처럼 화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의 슬픔과 아픔을 고스란히 마주하고 그것들을 인정하는 것.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기억은 잊혀짐으로 도피할 수 있다. 상처도 시간으로 덮고 모른 척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그 기억은 아마 내 발등을 찍은 쇠스랑처럼, 우물 속에 던져놓은 쇠스랑처럼 시도 때도 없이 오늘의 나를 불러낼 것이다. 그것을 건져내지 않으면, 불현 듯 떠오르는 기억 때문에 우리는 앞으로도 몇 번이나 가만히 멈춰 서서 마음의 진동을 견뎌내야 할지도 모른다.


이제는 함께 울어줄 수 있게 될지도
나는 본다. 얼마나 소소한 것들이 한 소녀의 시간에 흔적을 남겼는지. 소녀 신경숙의 세계와 부딪치는 역사적 사건들, 음악과 영화, 사람들. 말들. 그것들이 소녀 신경숙이 미처 깨닫지도 못하는 순간에 흔적을 남기기도 하고 작은 멍이 들게 한다. 그녀가 겨우 입 밖으로 뱉어낸 희재 언니와의 일. 열여섯의 소녀 자신이 아니고서는 결코 짐작하지 못할 그 슬픔과 상처. 이해할 수도 대처할 수도 없었던 소녀를 본다.

신경숙 특유의 감수성 넘치는 문장이 내 소매를, 옷깃을 서서히 적셔간다. 한쪽 팔꿈치를 적시는가 싶더니 어느새 깊숙한 마음까지 젖어간다. 열여섯의 신경숙, 그녀의 일기를 읽는 것이 아니라 마치 나의 이야기를 읽는 듯 함께 얕은 한숨을 내뱉고, 노조 이웃들의 고초에는 함께 입술을 앙다물기도 한다.

<외딴방>은 열여섯의 소녀의 상처를 보고 치유하는 과정을 통해 나 자신의 상처를 위로받는 책이다. 동시에 이웃의 상처를 들여다보고 짐작해보고 함께 아파하고 위로해보는, 그런 이야기다. 아직도 이 세계 속에는 외딴방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기에. 우리는 누구나 물리적인, 심리적인 외딴방을 갖고 있기에, 이 소설을 읽는 동안 누구나 우리는, 열여섯의 나,가 된다.

우리는 소설을 읽으며 결코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나의 슬픔을 기억해낸다. 그리고 소녀를 통해, 누군가 우리는 결코 이해하지 못할 슬픔을 겪기도 한다는 것을 본다. 그러므로 어쩌면 우리는 이제 이웃의 그 슬픔을 공감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마땅치 않은 위로의 말을 해주기보다는 함께 울어줄 수 있게 될 지도 모르겠다. 
  

외딴방에 작은 온기를 느끼다
<외딴방>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다. 우리는 느낄 것이다. 처음 내 외딴방을 발견했을 때, 이 책을 처음 봤을때의 나와 지금의 나가 조금은 달라져있다는 것을. 내 마음이 가 닿을 수 있는 범위가 조금은 더 넓고 깊어져있음을. 그리고 한때 열망이 들끓던 나의 차가운 외딴방에 작은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는 것을, 우리는 느낄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프로듀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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