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 집으로 돌아가는 늦은 밤.

비가 내려 젖어있는 도로를 걸으며, 진한 공기들을 가르며 나는 그만 또 생각 속으로 함몰되어 버렸다.

여기를 걷고 있지만, 나는 여기 없는 상태.

그럼 거긴 어디?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온 400여자의 단어들, 문장들이 내 머릿속을 휘몰아쳤다. 수도 없이 되뇌고 상상하고, 그 단어를 타고 나는, 내맘은 온통 꿀벌처럼 붕붕.

하지만 결코 가볍지도, 개운하지도 않은, 자꾸만 부정하고 싶어지는, 좋지만 좋지만도 않은, 기쁘지만 기쁘지만도 않은.

행복. 하지만, 행복. 하지만 행복. 하지만 이게 행복이면 안될것 같은.

 

 

길을 가다가 시를 쓰고 싶어졌다.

찬란하게 유치해서 반짝반짝 빛나는, 사랑의 언어들!

닿지 않는 편지처럼 자조적으로 읊는 시어들. 역시 진짜가 아니라 그런지 자꾸만 모방하게 되는 관습적인 말들.

 

 

이름, 머금기만 해도 깊은 한숨

메신저 대화창 같은 머릿속은 온종일 덜컹덜컹컹컹컹

네가 입력한 부호를 복사하고 복사하고

결국 암호가 되어버린 말들

머리칼 끄트머리까지, 손톱 끄트머리까지

단숨에 바싹, 까맣게 재로 바스라진다

얼굴도 목소리도 지워진 이 xxxxxxxxxx

네가 이땅에 없어서 다행이다

내 말을 들을 수도 거절할 수도 없어서 다행이다

올겨울, 신종플루보다 더무서운 것이 바다를 건너왔다

 

돌산으로 꽁꽁 감춰둔, 거대한 빙하로 단단히 얼려둔 용암,

천 일만에 다시 부글부글 화산

그 안에 세 글자, 담가버리고 싶다

한 손이 뭉개지더라도, 질식시켜 푹 담가버리고 싶다

 

 

앞으로 또 천일 후에, 지금의 이 병적인 열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이 글을 분석해봐야겠다.

지금은 분출하는 수밖에 없다. 담가버리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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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가 바뀌면 삶의 방식도 달라진다.
지난 일주일, 나는 여의도에 세 번 들렀다. 세 번 모두 다른 존재와 목적을 가진채 같은 길을 걸었다.
나는 국회의사당 1번 출구에서 세 번 내렸는데, 세 번 모두 같은 출구로 올라오면서, '이 출구로 나오기는 처음'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물론 목적지는 달랐을지언정, 나는 세 번 모두 같은 길을 걸은 셈인데, 세 번 모두 처음 걷는 길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이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세 번에 두번은 길을 헤맸고, 심지어 120에 전화를 걸어 길을 물어보기까지 했다.

점심을 십분 만에 해치우고 올라온 나는, 시간이 남아 근처 지역 탐방을 시도했다. 그래봤자 근처에 어떤 커피숍들이 있고, 던킨도너츠는 어디쯤에 포진해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한 탐색이었다. (맙소사, 나는 또 헤맸다. 어렸을 적부터 나의 가장 자랑스러운 점이 바로 낯선 길에서도 결코 헤매는 법이 없는 인간 네비게이션이라는 것인데!!!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나는 끝없이 사거리에 또 사거리가 붙어있고, 그 길 끝에 또다시 사거리로 이어지는 이해할 수 없는 건물들의 숲에 갇혀 더욱 당황하며 헤매고 있었다.

평소같으면 절대 들를 일이 없는 사무용품점에 들어갔다. 다른 존재재가 되었으므로 어쩐지 들어가면 뭔가 필요할 게 생길 것 같았다.
문방구용품을 기대하며 들어간 곳이었는데 그곳에는 기대 이상의 많은 물건들이 있었다. 깔고 앉으면 구름에 뜬 듯 폭신폭신 엉덩이를 감싸줄 것만 같은 방석, 맥심 커피로는 채워지지 않을 나의 드링킹 욕구를 해소해줄 수 있는 각종 티백, 서랍에 넣어 놓고 배고플때마다 하나씩 꺼내먹기 좋도록 작게 포장되어 있는 초콜릿, 진짜 당장 필요한 머그컵 등등등. 그곳에 전시된 모든 것이 여의도에서 밥벌이 하는 사무원들에게 꼬옥 필요한 모든 것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대체 사무용품점에서 왜 이따위 불량품같은 것을 팔고 있는게냐고 콧방귀를 뀌었겠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모든 상품이 가격 태그를 달고 있듯 자신의 당당한 용도를 내보이며 나를 유혹하고 있었다. 어메이징.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존재의 변화조차 내가 소비하는 것에서 느낄 수가 있구나. 

지금 내 책상위에는 엄지손가락 크기로 포장된 가나 초콜릿과 꿀유자자 시럽이 놓여있다. 자애로우신 분들이 하나씩 선사해주신 것. 이것 역시 무적의 사무용품점에서 공수된 것이리라. 예전에 사무용품점은 크리스마스 카드 도구를 살때나 가끔 스케치북 같이 시간 때우는 놀이용품을 사러가는 곳이었는데, 이제 생필품을 사러 가는 곳이 되었다. 음, 흥미로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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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그 사람이 말하는 표정을 보고도 저 사람이 어떤 사람이겠구나, 짐작하는 경우가 있는데
비록 쿠엔틴티란티노를 직접 보진 못했지만, 이제껏 그의 영화와 그가 출연한 영화와 관련된 수많은 영상과 사진을 통해 추측하건데, 티란티노는 참 멋진 연출가라는 생각이 든다. 그가 아주 마음에 든다.
 
그의 영화를 보면 그가 얼마나 영화를 좋아하는지 보는 사람까지 느끼게 해준다. 그는 역사를 상상하는 와중에도 영화를 잊지 않는다. 나치가 영화관 안에서 테러당한다는 설정은, 정말 티란티노다운, 그만의 상상력이다. 
 
그는 타고난 말재주꾼이자 이야기꾼이다. 단순히 재미있고 멋진 말을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언어, 말 자체를 다양한 방법으로 사용할 줄 안다. 이번 영화에서는 다양한 국적의 배우들을 캐스팅하고, 불어, 이태리어, 영어, 독일어라는 언어 자체를 소재로 사용하여 다양한 풍경과 코메디 상황을 만들어낸다. 그 광경을 보고 있으면 감탄을 금치 못할 정도인데, 심지어 영화 속 군인들은 바bar에 모여 단어게임을 즐기고 있을 정도다. 언어의 향연이 벌어지는 이 영화는 그만큼 자막을 따라가기 쉽지가 않지만, (그리고 실제로 저 다양한 언어를 직접 들을 수 있었으면 더 익사이팅했을것이다!!!) 그 풍경만으로도 단단한 재미를 챙길 수 있다.
 

 
 
티란티노의 영화는 폭력이 난무하고 때로는 잔인하기 이를데 없는 장면과 마주치곤 하지만, 그것은 굉장히 익살적인 상황과 맞닿아있다. 그리하여 그의 영화는 (이런 의미로) 만년 B(삐)끕무비다. 캐릭터의 코믹함, 혹은 상황 자체의 아이러니함 (이번 작품에서는 영사실에서 커플의 총격씬이 가장 충격적이었다 <-충격적일 정도로 재미있었다)은 그 어떤 잔혹함도 비틀어낸다.
 
티란티노는 거침이 없다. 이야기의 구성에 있어서도, 연출 혹은 대사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기승전결따위 없고, 특별히 주인공이 많이 나오고 중요한 일을 해야할 필요도 없다. 도대체 저들은 왜 저렇게 쓸데없는 일에 골몰하나도 싶지만, 이야기는 말에 출렁거리면서도 결말을 향해 흘러간다. 끝으로 갈수록 이야기는 마무리되기는 커녕, 더 당혹스럽고 난처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익살스러움을 그치지 않는다.
 
게다가 종종 DVD 서플먼트에 비치는, 연출하는 티란티노를 보라. 그가 자기 영화를 만들면서 얼마나 낄낄대며 좋아하는지 보고있는 사람마져 피식 웃음이 터져나올 지경이다. 만드는 사람이 저런 표정으로 만들고 있는데 영화가 재미가 없을리가 없다. 무엇보다도
 
 이런 쿠엔틴 티란티노를, 누군들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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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리 전투
감독 질로 폰테코르보 (1966 / 이탈리아, 알제리)
출연 브레힘 하쟈드, 쟝 마틴, 야세프 사디, 푸시아 엘 카데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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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큐브 특별 상영으로 보게 된 영화. 영화관에서 볼 수 있음에 감사했다.
올해 가장 인상적이었던 영화로 단연 이 영화를 꼽고 싶다.
 
 
혁명을 성공하는 건 어렵다
그보다는 혁명을 유지시키는게 어렵고
그보다는 혁명 그 이후의 세계를 만들어나가는게 더 어렵다는 것을 알려준 영화
 
 
프랑스의 알제리 지배, 그 세계속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살인과 복수, 끝없이 죽고 죽어가는 프랑스와 알제리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황폐화 된 일상을 고스란히 담아내면서도 영화는 영화적인 매력을 잃지 않았다.
 
사건 곳곳에 익명의 얼굴들이 카메라의 잡힌다. 대중들의 얼굴을 놓치지 않는 카메라는,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영화적 정서를 만들어낸다. 때로 그들의 얼굴이, 알제리 시민들의 눈빛이 대사보다 더 많은 말들을 쏟아낸다.
 
곳곳에 명대사와 인상적인 장면들이 넘쳐났다. 긴장과 유머, 전쟁의 비통함과 혁명과 시민들. 이 모든 것들이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2시간 동안의 '그때 그곳'의 삶을 구축해낸다. 혁명에 관한 영화 중 가장 사실적이고 힘있는 영화였다. 그리고 단순히 혁명을 일으키자는 선동영화가 아닌, 혁명이라는 것에 관한 고민이 담겨있는 영화였다. 나 역시 이 영화를 통해 혁명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고, 어떻게 유지되고, 어떻게 사회를 바꿔나가야 하는가 고민해볼 수 있었다. (이런 교과서같은 영화가, 이렇게 재미있을 수 있다니... 진정한 명작)
 
바구니 테러를 비난하는 외신기자들에게 "당신네 폭격기를 주면, 우리 바구니를 드리죠"라며 당당하게 눙치는 모습, 혁명을 돕는 꼬마가 "겁먹지 마세요! 우리가 이길거에요"라고 중앙 마이크를 뽑아 외치는 장면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알제리의 혁명은 혁명단원들로부터 이뤄지지 않았다. 알제리 혁명단원들이 모조리 처형되고 더이상 희망도 변화도 없을 것만 같은 그때, 알제리에서 혁명이 일어난다. 결국 해방군은 그렇게 다 죽었지만, 190년동안 그들이 못하던 일을, 민중들이 2년만에 해냈다.
 
 
 
"아무도 왜 어떻게 시작됐는지 몰랐다.
사람들은 춤추듯 뛰어나왔다.
곳곳에 섬뜩한 함성이 울려퍼졌다" 
 
독립을 달라... 자존심을 돌려달라...

 
 
 
안개가 걷히며 보이지 않던 수만명의 사람들이 달려나올 때, 정말 가슴 깊은 곳에서 감동이 터져나왔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역사는 누군가의 예상대로 결코 흘러가지 않더라. 그것이 선한계획이든 악한계획이든 역사는 제아무리 악명높은 독재, 압제의 시대 속에서도 개인에 의해 좌지우지되지 않는다. 이어지는 탱크의 진압장면...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도 낯선 장면이 아닐 것이다. 그날의 역사가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에 묘한 충격과 감동.
 
함께 영화를 보던 관객들의 연령층은 제각각이었다. 아버지보다 연세가 많으신 분들도 몇몇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그들과 숨죽이며 본 2시간.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고, 어쩐지 숙연해진 얼굴로 극장을 나오던 그 풍경. 아마 올해 잊지 못할 풍경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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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원작은 세 권짜리 소설이다. 일찌감치 책을 읽고 영화개봉을 기다렸던 나는, 이 이야기를 제대로 담기 위해서라면, 11시간짜리 드라마는 아니더라도 4시간짜리 러닝타임정도는 확보해야 하는 게 아닐까 상상했었다. 그만큼 등장인물도 많고 사건도 많을뿐더러 이 모든 이야기와 인물들이 한 방향을 향해 가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원작보다 나은 개작은 없다고. 이제까지 영화경험을 살려봤을 때 대부분의 작품은 그러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원작’이라는 것 자체가 소설로 쓸 수밖에 없어서 소설로 씌여진 이야기이고, 영화로 찍을 수 밖에 없어서 영화로 찍힌 이야기가 아닌가. 다른 매체로의 이동은 처음부터 그대로 담아낼 수 없는 한계를 지닌 것이다. 그러므로, 원작 <백야행>에 홀린 나는 영화 개봉일을 손꼽아 기다리면서도, 내심 기대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라고는하지만, 결국 매일매일 기대하며 기다린 셈이 되었다.)

 

 

영화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이렇게 가슴속에서 긴장감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온 적은 처음이었다. 이 문장을 정확히 해석하자면, 첫 장면이 보이자마자 내 머리 속에 늘 흐르던 <백야행> 이야기가 맞물려가면서 나는 처음을 보면서도 처음-중간-끝을 상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머릿속에는 장면장면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강렬한 서술이 한문장 한문장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물론 영화는 첫 장면부터 강렬한 이미지로 시작한다. 살인 장면과 러브신장면을 점차 높아져가는 클래식 선율에 맞추어 긴장감을 한껏 끌어올린다. 소설에서는 요한과 미호의 이야기가 거의 평행을 이루며 서술된다. 독자는 스스로 교접점을 찾아가며 군데군데 안타까움 혹은 놀라움의 탄성을 자아내는 재미가 있다. 이러한 구성은 밝은 하늘 아래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하는 두 사람의 사랑의 안타까움을 고조시킨다.


이에 반해서 영화는 요한과 미호의 개별적인 이야기는 줄이고, 서로 떨어져있는 두 사람이 만나고 연결되는 접점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꾸려 나간다. 그러므로 영화 속에서는 초반부터 두 사람이 어떤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관객은 알 게 된다. 자꾸만 연결되는 생활의 동선과 삶의 영역을 통해 화려한 태양 같은 미호의 삶과 어두운 그늘 속의 요한의 삶이 더욱 대비된다. 영화는 현명하게도 소설 속 다른 매력적인 이야기 거리를 과감하게 삭제하고 두 사람의 사랑과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하여 영화는 소설 속 수많은 사건이 미세한 흔적만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에도 집중력을 잃지 않고 끝을 향해 우직하게 나아간다.

 



박연선 작가의 대사는 역시나 만족스러웠다. 소설 속에서 형사가 왜 그토록 14년 전 사건에 집착하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나오지는 않는데, 영화 속에서는 아들의 죽음을 결부시켜 당위성을 장치해 두었다. 또 소설 속 중요한 명대사들을 곳곳에 배치해두어 영화 곳곳에서 소설 속에서 느꼈던 문장의 맛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TV프로그램을 ‘동물의 왕국’으로 바꾸어 원숭이와 새끼 일화로 비유를 하는 등 세세한 디테일적인 부분도 자연스럽게 처리되었다. 또 마지막 옥상에서의 대치 장면은 소설 속에 없던 장면인데도 불구 형사와 요한의 울부짖음이 무척이나 극적으로 다가왔다.

“미안하다. 더 일찍 잡아주지 못해서......”

"그거 아세요? 태양이 높이 뜨면, 그림자는 사라지는 거에요"


  

 

밝음과 어둠- 빛의 대비인 만큼 스크린 속에서 만나는 요한과 미호의 모습은 소설 속 그것보다 훨씬 강렬하다. 다만, 각 캐릭터가 품고 있는 고유의 분위기를 살리는 데에는 조금 미흡했다. 물론 소설 페이지와 러닝타임의 차이겠지만, 소설 속에서는 여러 사건들을 통해 설득력있게 획득되는 요한과 미호의 독특한 분위기와 신비로움이 영화 속에서는 평면적으로 드러났다. 소설을 읽지 않은 사람이라면, “끝까지 지켜줄게!”라며 끊임없이 살인을 저지르는 요한과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라며 냉혹하게 죽음을 사주(使嗾)하는 미호라는 인물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까, 의문이 조금 들기도 했다.

 

오히려 영화에서 요한은 조금 더 순정적인 남자로 느껴졌다. 소설 속에서도 그는 헌신적이었지만 천재적인 지능이 돋보이는 냉혹한 남자로 느껴졌는데 극 중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고수의 모습은 조금 더 여린, (어른보다는) 청년의 느낌이 들었다. 오히려 미호가 소설 속보다 더 단단하게 그려졌다. 늘 비밀스러운 미소를 띠고는 있지만, 군데군데에서 인상을 쓰고, 이를 악무는 모습이 무척이나 자연스럽고 인상적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이 직접 만나거나 통화를 하거나 눈빛을 교환하는 것, 혹은 그저 스쳐지나갈 지라도 곁에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관객으로서 큰 쾌감이 아닐 수 없었다. 소설 <백야행>에서 단 한 번도 두 사람의 만남이나 접촉(사랑)을 볼 수 없어서 얼마나 아쉬웠던가. 비록 행복한 장면은 드물었지만, 늘 주변을 맴돌고 지켜주고 있는 요한의 존재를 직접 보는 것만으로도 강렬한 애틋함이 있었다. 그래서일까. 소설을 읽을 땐, 마지막 장면에서의 미호가 내내 마음을 떠나지 않았는데, 영화 속에서는 요한의 마지막 미소가 기억에 남는다.

 

그 미소를 떠올리니, 다시 한번 요한이 보고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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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피트 닥터, 밥 피터슨 (2009 / 미국)
출연 이순재, 에드워드 애스너, 크리스토퍼 플러머, 조던 나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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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영화를 제일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내가 상징적으로 가지고 있는 - 그러니까 누가 물으면 이 영화 제목을 대야지- 영화 제목을 읊는다. 사실 그것은 내가 제일 좋아한다기보다 좋아하는 영화 중 일부다. 제각기의 남다른 가치와 매력을 뽐내는 좋은 영화가 많아 그 중에서 제일은 고르기 힘들다. 차라리 어느 감독의 제일 좋은 영화, 정도면 또 모르겠다.

 

또 어려운 질문은 제일 좋아하는 감독이 누구냐는 질문이다. 이것도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좋아하는 영화는 말할 수 있어도 좋아하는 감독을 말하는데는 꽤 오랜시간이 걸리는데, 일단 좋아하는 감독이 많긴 한데 그들의 모든 것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혹은 모든 영화를 보지 않았다는 것이 첫번째 이유. 두번째로는 내가 좋아하는 몇몇 감독들은 영화와 관계없는 그들의 영화 밖 모습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는 점이 두번째 이유. 결론적으로 이것 역시 무척이나 우러러보고 좋아하기 때문에 꼽기 어렵다. 멋진 사람(영화)들이 너무 많아서, 알면 알수록 더 멋진 사람(영화)들을 알게 된다. 그게 영화의 세계의 매력이다. 그래도 말이 나왔으니 답을 좀 내고 가자면,

 

최근에 개봉한 영화중에 가장 좋아하는 감독은? 당연 쿠엔틴 티란티노

최근에 가장 관심있는 감독은? 제인 캠피온, 스티븐 달드리

존경한다고 말하고 싶은 감독은? 스탠리 큐브릭

 

흠. 이런 식으로 나는 한시간 정도 계속 써내려갈 수도 있을 것 같다. 

 

최근에 친구와 "네가 좋아하는 영화 장르는 무엇이니"라는 질문을 하고 답을 준비하면서, 나는 특별히 좋아하는 장르는 없다고 말했고, 생각해왔는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이 점은 최근에 영화를 촬영하면서도 느낀 바 있어 몇자 적는다.

 

그러니까 누누히 나는 멜로를 만들고 싶어하는데도 불구, 자꾸 피가 낭자하고 죽음의 기운이 엄습한 스릴러 장르의 결과물에 다가간다는 것이다. 첫번째 영화야 기획자체가 그랬다-기보다도 그것 역시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자는 목표였는데, 그 재미가 스럴러적인 재미로 드러났다. 이제껏 내가 썼던 몇가지 시나리오에는 대부분 쫓는자와 쫓기는자가 등장하고 추격씬 혹은 한밤중에 범죄사건이 대부분 등장한다는 걸 알 수 있다. (호오)

  

그러니까 안하는 것은 의미이지만, 다르게 하고 싶은데 자꾸만 한쪽으로 쏠리는 것은, 이거 숨겨진 취향의 문제가 아닌가 싶은 것이다. 내가 자꾸 그렇게 만들고 있다는 것은, 그러한 것을 보고 싶다는 욕망의 발현이 아닐까? 그렇다면 왜 자꾸 그런 이야기를 만드는가? 나는 영화가 영화적이길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일상의 풍경을 담아 현실과 소통하는 영화도 좋지만, 나는 '이것이 영화다'는 걸 인식시켜주면서 시각적인 상상력을 극하게 밀어붙이는 데에 재미를 느낀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나는 그런 스릴러나 어두운 영화를 즐겨보는 편이 아니라는 것. 정말인가? 한번 살펴보자고 생각해봤는데....... 내가 최고로 치는 영화들, 이를테면 <메멘토> <파이트클럽> <괴물> <드레그미투헬>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흠=_-

 

 

이런 측면에서 최근에 본 세 편의 영화를 논해보자.

 

왜 취향의 문제를 들썩거렸는가하면, 사람들의 많은 추천을 받고 본 영화가 기대만큼 재밌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기대하지 않고 본 영화를 재미있게 봐서 이것이 취향의 문제인지 검토해보고 싶었다. 그랬더니, 역시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다. 그러므로 줄거리 생략, 취향따라 꽂힌 부분, 별로인 부분 톡톡 집어가며 되는대로 평하겠음을 미리 알려둔다.

 

 

첫 번째로, <업>을 보았다.

이건 몇몇의 지인이 입을 모아 "어떻게 이런 영화를 보지 않을 수 있느냐."라고 말했는데, 마치 그 말이 "네가 세상 사는 재미를 제대로 알고는 있느냐"처럼 들렸기 때문에, 일종의 의무감으로 챙겨본 영화다. 예상치 못한 장면은 프레드릭슨 할아버지의 유년부터 성장기까지 동화책 넘어가듯 그려진 부분이었다. 꽤 인상적이었다. 이런 걸 흔히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옛시절'이라고 표현하는데, 동시에 우리는 이렇게 과거를 회상할 때 "영화처럼 흘러갔다"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고로 나는 이러한 풍경이 꽤나 영화적이라고 생각한다. 고전적이지만, 어차피 영화란 인간의 삶을 그리고 있으므로. 대부분의 영화는 한 시점, 혹은 한 사건을 그리는데 골몰하지만 한 사람의 인생을 쭈욱 훑어주는 것- 그 사람이 영웅도 아닌 평범한 사람인데도 말이다-이 나에겐 때때로 감동을 준다. (워싱턴 포스트는 “신랄함과 우아함에 있어 채플린의 그것만큼 가치있다”라고 이 4분짜리 오프닝씬을 평하기도 했다.)

최근에 아시아나 단편영화제에서 <구멍>이라는 이스라엘 단편영화를 보았다. 5분짜리 짧은 영상인데, 늙으신 할머니가 깜깜한 눈을 껌벅거리시면서 바늘에 실을 꿰려고 한다. 그러다 겨우 들어가 바늘이 실을 타고 쭈욱 떨어지는 그 찰나, 할머니의 인생이 앨범처럼 지나간다. 그래, 나는 언제나 '이 사람이 그 사람이었고, 그 사람이 이렇게 되었다'는 변신 혹은 변화에 애착을 가지고 있다. 그건 참 짠한 풍경이다. 언제나 내 예전 사진을 돌아봤을 때 짠해지는 것마냥 말이다. 그래서 그것이 만화임에도 불구, 어린 프레드릭씨가 할아버지가 되는 짧은 찰나가 내게는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공간을 이동하는 연출이 눈에 띄었다. 다음에 꼭 써보고 싶은 효과인데, 인물에 포커스를 두고 배경만 바꾸어 공간을 이동하는 것이다. 이런 만화적인 연출이 무척이나 효율적이고 흥미로웠다. 그리고 뭐니뭐니해도 명장면은 집이 하늘 가득 매워버릴 풍선을 매달고 둥둥 떠오르는 장면일 것이다. 뭐랄까, 어디에도 부딪치지 않고 떠오르는 집을 보면서, 저거 어느정도 높이 올라가면 호흡하기 어려운거 아닐까,라며 프레드릭슨의 호흡기 걱정을 한 나에게서 동심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는 걸까? 하지만 나는 정말 진지하게 걱정이 되었다. 저 집이 떠오르다가 어딘가 부딪칠 텐데, 떠오를때 배수관 및 땅에 연결된 것들은 어떻게 되는거지? 집이 떨어지면 그 밑에 혹시 사람이 깔리는 건 아닐까? 뭐 이런...... 너무 상상력을 자극하는 만화라서 그런지 자꾸 산만한 생각이 들었다.

 

결정적인 것은 너무 명확한 기승전결 구조다. 그러니까 이런 게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게 나란 사람이란 것도 어쩔 수 없다. 그러니까 요즘 내 영화 취향을 여기에서 기대자. 나는 결말같지 않은, 갑자기 뚝 끊겨버린 듯한 결말. 영화가 끝나도 계속 주인공을 걱정하게 만드는 결말, 삶은 죽음과 같지 않기에, 영화역시 삶처럼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도 계속 이어질 것만 같은 결말에 끌린다. 러셀이 도요새를 구하러가야겠다고 말하는 순간, 똘똘말린 레드카펫이 눈앞에 쫙 펼쳐지듯이 선명해지는 결말 구조가 내 흥을 깨뜨렸다. 그 순간부터 조금 지루해졌다. 그나마 기억에 남는 장면은 영화의 끝부분, 할아버지와 노인이 코너에 앉아서 자동차 색깔 맞추기를 하고 있는 훈훈한 장면이다.

 

러셀의 얼굴이 고개를 돌릴 수 없을 만큼 귀엽고 앙증맞았고, 할아버지의 시종일관 "NO"가 랩처럼 흥미로웠던 점, 즉 캐릭터 구축에 있어서는 픽사와 디즈니만큼 매력적인 능력자들도 없다. 하지만 현실 바깥 - 이를테면 숲속이나 장난감 세계-에서의 일들이 환상적이고 상상적으로 처리되는 부분은 영화를 보며 의심없이 믿게 되지만, 현실적인 부분 - 그러니까 집이 풍선에 매달려 하늘에 떠올라 남미까지 간다-에서는 조금 설득력이 부족한게 아닌가 싶다.

 

나는 현실성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저 설득력있는 논리만을 기대한다. 그것이 영화의 재미다. 잘 구축된 상상력의 재미다. 외계인에게 침공당한 지구가 배경이다 하더라도 그 외계인이 왜 여기에 왔으며 어떻게 왔고, 뭘 어떻게 하면서 살아가는지가 논리적이라면 그것은 충분히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이런데에 비해 <업>은 좀 두루뭉술한 설정이 많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집이 떠오를 때 다른 건물과 부딪치지 않기 위해 풍선에 장치를 해두거나 ( GPS) 높이 솟아 오를때 호흡기를 쓴다거나. 이런 디테일이 있었다면 더욱 박장대소를 했을텐데! 하지만 캐릭터 부분에서만큼은 에니매이션이라는 장르를 뛰어넘는다는 것, 그러니까 더이상 캐릭터가 동화속에 나올법하지 않은, 길가다 우연히라도 마주칠 것만같은 캐릭터라는 것은 무척이나 흥미로웠다는 점을 다시한번 언급하며 맺는다.

 

 

 나머지 두편의 영화는 다음시간에..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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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나는 지금 무척 심심해서 글을 쓰기로 생각했다.

몇가지 쓰고 싶은 것들이 머릿속에 뒤엉켜있는데

 



지난주에는 추수감사절이었다.

우리 친척중에는 교회에서 일을 하시는 분이 계시는데, 추수감사절에는 일주일 내내 이어지는 새벽예배 때문에 출근시간이 훨씬 이르다. 그 교회는 우리 집 근처에 있다. 그리하여 그 친척분은 일주일동안 우리 집에 머무르셨다. 내동생과 나는 친척분의 방문을 무척이나 즐거워하는데 그 까닭은 이 친척분이 우리 남매가 치킨을 무척이나 즐겨먹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 지난주에는 치킨-피자-치킨-치킨의 경의로운 야식메뉴가 구성되었다. 

 
어제, 그러니까 월요일. 추수감사절이 지난 어제, 내동생은 일어나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벌써 가셨어?"

이말은 꼭 내게 이렇게 들렸다. Chicken is gone ...

(물론 우리 남매는 치킨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친척분을 사랑한다.)

 

어쨌거나, 놀라운 것은 바로 어제, 치킨이 없는 자리를 섭섭해하기도 전에, 아버지가 피자를 사오셨다는 것이다. 하여 우리는 "치킨-피자-치킨-치킨-피자"를 이을 수 있게 되었다. 어제 먹은 피자는 나의 경사스러운 일을 축하하기 위해 아버지가 특별히 귀가 길에 피자 가게에 들르신 것이다. (생뚱맞게도 내가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을 받게 되었다. 껄껄껄) 어쨌거나 내 친구 말에 의하면, 크리스마스때나 먹을 만한 비싼 피자를 한 주의 한판씩 먹어치운 나로써는 황홀하기 그지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래, 난 너를 정말 좋아하는 모양이야.

 

문득 먹는 것에 대해 글을 쓰고 싶어졌다. 개인적으로 피자랑 치킨은 그 어감이 상당이 모냥새빠진다고 생각한다. 치킨은 그렇다치고, pizza라는 외국어를 형상학적으로 보았을때, 문자 자체에서 피자의 이미지가 그려진다. p자를 닮은 판에서 둥그렇게 모양을 내고 그위에 토핑을 톡톡 올려놓고(i) 화로에 구워 바로 먹었을 때 z처럼 쭈욱 늘어나는 치즈들. 그리고 우리는 말한다.

 

"a~" 아, 맛있다.

 

이런 영어 표기에 비해 '피자'는 너무 가볍고 패스트푸드의 냄새가 너무 진하게 난다. 피자의 말랑말랑하고 쫀득쫀득함에 비해 이 단어는 펑퍼짐하게 퍼진 느낌이 심하게 든다. 이렇게 쓰고 나니 더욱 이런 생각이 든다. 그래, 난 너를 정말 좋아하는 모양이야.

 

사실 내가 딱히 가리는 음식은 세상에 딱 세가지가 있는데- 노란 슬라이스 치즈와 가지요리와 노오란 호박- 차라리 대부분의 음식을 잘 먹는다고 하는 편이 낫겠다. 실제로 무슨 음식을 제일 좋아하냐는 질문은 무척이나 당혹스럽다. 시시때때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슨 음식이든 '맛있는' 음식을 제일 좋아한다. 그래서 내가 제일 꺼리는 상황은, 아무 정보도 없이 어느 음식점에 찾아가야 하는데 마땅히 가고싶은 곳도 없을 때다.

 

 맛집에 대한 집착의 기원은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된다. 아마 중학생? 때부터 나는 나만의 맛집 정보 노트를 가지고 있었다. 때때로 친구들은 어느 동네에 떨어지면, 어디가 맛있냐고 전화를 걸어오기도 했다. 그러면 나는 그 노트를 휘리릭 넘기며 지역 정보를 전해준다. 이런 일이 꽤 오랫동안 진행되었는데, 언제나 정보력이 많은 나는 늘 그런 정보통이었던 것 같다. 맛집, 재밌는 곳, 가볼 만한 카페, 뭐 이런 것에 언제가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늘 모든 선택은 나로부터 정해졌는데, 대학교 2학년 때쯔음 나는 이런 지역정보지 역할에 흥미를 잃었다. 그래, 너무 오래 했다.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깜짝 놀랄만한 근사한 것들을 소개해주느라 나는 늘 그것을 알고 있어야 했고, 언제나 한시간짜리 예고편을 보고 두시간짜리 영화를 보러 들어간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가 '너를 배려하기 때문에 네가 좋아하는 곳, 네가 먹고싶어 하는 곳으로 가자'는 말에서 생뚱맞게 무책임감을 느끼는 까닭이다. 그래서 요즘은? 나의 오래된 베태랑 친구들을 만날 때는 한치의 의심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즐겁게 나가지만, 처음 만나는 사람이나 서로 기대없이 만나는 경우 습관처럼 나는 주변 검색을 하고 나가야 마음이 편하다. 이곳이 남도가 아니기 때문에, 서울의 아무 식당 문을 열었을때 기분좋게 먹고 나올 수 있는 곳이 10곳 중 세곳이 안될 것이라는게 개인적인 지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하나의 예외가 있다면, 피자만큼은 어디서 먹어도 맛있는 것 같다. 아무래도 나는 피자의 존재 자체를 사랑하는 모양이다. 물론 비쌀수록 맛있는게 피자이지만 나는 배고플 때 도서관앞에서 친구와 2500원을 모아서 사먹는 작은 피자도 맛있고, 체인점에서 먹는 호화로운 피자도 맛있고, 이탈리아 음식점에서 먹는 피자도 전부 맛있다. 물론 차등은 있지만, 언제나 좋은 기억 뿐이다.

 

내가 자주 가는 도서관 근처에는 백화점이 하나 있고 그 안에 리미니 레스토랑이 있다. 거기서 종이조각같이 얇아서, 한 손에 둘둘 말아 두 입에 넣고 싶은 피자를 파는데 그것이 며칠 전부터 계속 생각나는 거다. 이상하게 기회가 잘 안닿았다. 그런데 문득, 오늘 생각해보니 그것이 또 먹고 싶은 거다. 어째서 피자는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을까? 이건 연구대상이다.

 

많은 사람들은 외국에 나가면 음식 때문에 고생을 한다지만, 나는 한번도 외국에서 음식 때문에 고생을 해 본 적이 없다. 음식에 대한 적응력 만큼은 원어민수준이다. 아프리카에서 처음 아프리카식 저녁을 먹었을 때, 나는 정녕 이곳이 내 고향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을 했다. 평소에도 밥은 거의 안먹는 (그러니까 반찬만 먹는) 나는 밥 없는 생활이 충분히 가능했다. 고작해야 가끔 떡볶이 생각이 났을 뿐, 나는 밥 보다 좋아하는 빵과 고기의 나라에서 한번도 음식 때문에 슬펐던 적이 없었다. 아마 먹는 것 때문이라면, 평생 여기서 살아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중국은 어땠던가. 함께 갔던 사람들은 죄다 고추장에 멸치를 꺼내 밥을 먹을 때, 나는 중국인보다 더 맛있게 향신료 가득친 마파두부를 떠먹고, 베이징덕을 먹었다. 그 어떤 냄새나 맛도 두려웠던 적이 없었다. 아프리카에서 돌아왔을 때도 타조고기와 낙타술이 가장 그리웠다고 하면, 음, 너무 야만적인가. 하지만 미각 때문에 정말 고생했다. 가끔 가다 정말 아프리카 음식 냄새 혹은 맛이 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는 그립다는 생각보다 눈물이 먼저 난다. 마치 어떤 풍경보다도 그곳에서의 노랫가락, 선율 한 자락이 더 그리움을 자아내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나는 한가지 음식에 중독되면 그것이 질릴 때까지 먹곤 한다. 예전에 치기어리던 시절에는 그랬다. 크림 스파게티가 좋아서, 서울의 모든 스파게티를 접수해서 랭킹을 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만의 베스트를 갖게 된 후에 중단했는데, 지금은 그런 것에 별로 흥미는 없다. 다만 내가 가끔 그런 별난 짓을 할 때 엄마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 그래도 평생 그것만 먹고 살라고 하면 지겨울걸!" 하지만, 정말 그럴까. 아. 피자는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왜 갑자기 피자 타령인가 하면, 최근에 먹은 피자 생각과 먹고 싶은 피자 생각에 더해 오늘 굉장히 웃긴 장면을 맞닥뜨렸기 때문이다. '붕어빵'이라는 TV프로그램이었다. 아버지와 아들 둘이 나와 퀴즈를 푸는데 정은표씨 아들 정지웅군이 출연했다. 사회자가 이 아들에게 장래희망이 무엇이냐고 했더니, 녀석의 대답이 과관이었다.

 

"전 만화가가 되고 싶은데,

아빠가 우리모두 살 수 있다고 피자가 되래요."

 

 

 

우와, 난 진짜 멋진 말이라고 생각했다. 피자가 되라니!

마저 감격할 틈도 없이, 알고보니 피디라는 발음이 빠진 잇사이로 새어 피자가 된 것이었다. 한바탕 웃음이 터졌는데, 나는 곰곰히 피자가 된다는 게 뭘까 하고 생각했다. 만약 나같은 사람에게 피자가 된다는 꿈은 무척이나 근사한게 아닌가 싶은 것이다. 언제 먹어도 질리지 않고, 행복하게해주고, 아무말 없이도 웃게 만들어주는 것이랄까.

 
생각해보니 나는 한때 "~피자가 낫다"는 수사를 종종 쓰기도 했다. 이를테면, 너보다 피자가 낫다. 뭐 보다 피자가 낫겠다. 라는 식의 관용구랄까. 그러고보니 피자와 나의 인연이 깊구나. 

 하지만 피자는 너무 일상적?으로 먹는 음식이라서 뭐랄까 특별한 기분은 덜한 건 분명하다. 무슨 날이기때문에 피자를 일부러 먹는 일은 거의 없다. 나에게 피자는 아버지의 선물같은 것이다. 아버지가 사오시면 먹는날(사랑합니다) 나의 바람은 그저 가끔 먹는 피자를 주식처럼 먹고 싶다는 것일 뿐.

  

Good taste food maks me happy.

 

피자가 되래요, 에서 시작한 피자 타령이 길어졌다. 여름에도 좋아했지만, 겨울이 되니 따끈따끈한 국물과 탕이 더욱 반갑고, 먹는 풍경이 어쩐지 더욱 따뜻하고 훈훈하게 느껴져 괜히 기분이 좋다. 올 겨울에도 맛있는 풍경 속에 많이 담겼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도 피자같은 사람이 되어야 겠다고도 슬며시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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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

 

n.

 

 

 

 불합리한 노동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만드는 주문같은 추임새.

(예시_"네가 누나잖아")

 

 

 'ㄴ'이 두번이나 들어감으로써, 마치 무언가 한없이 퍼줄것만 같은,

모든 걸 이해해줄것만 같은 환상을 자아내게하는 명사.

 

 

이런 형상학적으로 따져봤을 때 '누나니까'라는 말이 지니는 이미지상의 폭격을 보라.

ㄴ이 3개에 마지막에 두개의 ㄴ이 뒤집혀져있는 저 단어는

보기만해도, 듣기만해도 과중한 부담감을 주고 있지 않은가!

 

 

순식간에 뿜어져나오는 아이돌 사랑에, 때때로 거침없이 찬물을 끼치는 정체성.

(예시_ "맞다.. 내가 니 '누나'지")

 

 

부르면 뛰어가고 싶은 사람: 유승호

부르면 도망가고 싶은 사람: 마이브라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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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진중권 (한겨레출판사,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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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은 구절
진정한 의미의 특권층은, 소위 말하는 1%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일을 고르고 그걸로 밥을 먹을 수 있으면 그거야말로 특권층이거든요. 후자의 1%는 원하기만 하면 누구나 될 수 있어요. (진중권)

이처럼 한번 어떤 일이 좌절된 것에 부노하고 나면, 그 다음 기회가 왔을 때 그것을 굉장히 강하게 추구하게 됩니다. 분노의 경험이 강한 동기부여 기제로 작용하는 것이죠. (정재승) 

이타주의는 절대로 안먹힐 거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이타주의라는 건 뒤집힌 이기주의이기 때문이죠. 우리가 사회에 대해 생각할 때는 나와 남이라는 구분을 떠나서 '그냥 사람이다'라는 차원에서 생각해봐야 되거든요.(홍기빈)

당신이 만약 어떤 식품을 구매했다면, 당신은 그 식품의 존재를 '정치적으로' 지지하는 겁니다. (안병수)

자신이 감추고 싶은 부분을 감추는데 쓸 에너지를 자기 객관화해서 자존감을 가짐으로써 안 쓰기 시작하면 그만큼의 법보가 생기는 거죠. 이 법보가 생기면 비로소 남을 쳐다볼 여유가 생겨요. (김어준)


같이 읽으면 좋은 책
  • 정의론 - 존 롤스 지음 |황경식 옮김

 

요즘 정말 '화'날 일 많다. 뉴스보고 신문보면 여기저기 성질 돋우는 기사들 투성인데, 화내기는 쉬워도 화풀기는 어렵다. 그래서 '욱'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이미 다들 성이 돋아있는 상태이기 때문일까, 살짝만 찔러도 '욱' 화를 내뱉는다. 물론 나 역시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서 올해 인터뷰특강이 <화>라는 것이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예전에는 사회문제라고 하면, 소위 어느 특정 계급 위주의 문제였다. 이를테면, 노동자면 노동자, 어린이면 어린이, 혹은 어느 단체 등등. 2009년 지금의 사회 문제는 전 국민 범위다. 최근의 문제거리- 이를테면, 비정규직 혹은 행정인턴, 용산참사, 신종플루, 등등은 어느 계층, 나이대도 빠져나갈 수 없는 범위망을 자랑하고 있다.  전 국민이 뉴스를 보며 '내 문제다'싶어 한숨을 한번만 쉬어도 금세 땅이 꺼져버리지 않을까. 이러다가 전국민이 노이로제에 걸리는 사태에 다다를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금의 사태에 각자의 답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행동해야 한다. 언제나 화만 내고 있을 수는 없잖은가.

 

그러므로 더이상 내 문제, 네 문제를 갈라서는 안될 때다. 홍기빈 연구원 말마따나 '나와 너'를 가르는 순간 연대는 불가능하다. 지금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능력은 공감하는 능력이고, 네 일도 내 일처럼 느끼고 행동하는 연대의식이다. 물론 개인적인 문제가 커질 수록 사람들은 연대에서 멀어지고, 서로 참견하지 않으려 하고, 내새끼 내가족을 더 끌어안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이제는 네 문제가 언제라도 내 문제가 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만 한다.

 

나는 행동하는 방식으로 책을 읽고 글을 쓰기로 했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그 꾸준함이라고 진중권은 말한다. 화를 내는 것도 '욱'하고 뿜고 뒤돌아서 계면쩍어질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분노를 갖고 그것을 창의적으로 표출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촛불집회에서 나타난 분노, 그 즐거운 분노는 굉장히 중요하지만 그것이 우리를 목표로 데려다주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라는 진중권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이제 우리는 대중의 화를 '기획'해야 한다.

 

화가 날 일은 비단 정치문제 뿐이 아니다. 금태섭의 강의는, 분노의 시대, 불안한 시대정서 때문에 다시금 추동되고 있는 사형제도의 문제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게 한다. '사형을 찬성할 것인가, 반대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이제 너무나 오래 던져져 낡아버린 질문이지만, 여전히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기도 하다. 이 문제를 우리는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금태섭 전 검사는 좋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과자, 내 아이를 해치는 달콤한 유혹>으로 한때 화제가 되었던 안병수는 '화난 음식이 화를 부른다'는 흥미로운 주제로 우리가 매일 먹는 음식이 우리의 생활과 감정을 얼마나 끔찍하게 비틀 수 있는지 경고한다. 김어준은 자신의 경험과 관련하여 어째서 '성의 출발점이 타자에 대한 상상력'인지 유쾌한 어투로 생생하게 전해준다.

 

자신을 바꾸기 위해서는 습관을 바꿔야한다, 이 책을 읽고, 마치 <성공하는 사람의 일곱가지 습관>에나 나올 법한 이 메시지가 떠올랐다. 쉽게 선택하는 음식, 메뉴고르듯 쉽게 결정해버리는 수많은 판단들, 너무나 쉽게 내버리는 화, 우리는 이런 것들을 다시 재고해야 한다. 왜 내가 화를 내는가? 왜 내가 그것을 먹는가? 한번쯤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생활양식을 정의해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 How to 가 도출되기 때문이다.

 

내가 왜 화를 내는가? 내 숨기고 싶은 부분이 들통나서 화가 나는가? 내가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들어서 화가 나는가? 그 까닭은 무엇인가? 곰곰히 들어가보면 결국 '남의 일'처럼 보이는 사건에서도 '나의 문제'를 발견할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문제를 발견하는 순간, 우리는 다른 사람이 왜 화를 내는지, 도무지 알수가 없는 옆사람의 마음도 짐작하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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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준

그리고 생각 2009. 10. 26. 17:55



살다보면,
아무 의미없이 읽던 글귀가 어느 순간 중요해지는 때가 있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중에 맬빈 유달(잭니콜슨)은 이런 말을 한다.


"You make me wanna be a better man"


사랑에 대한 많은 명대사가 있는데, 
요즘은 자꾸 이 말이 머릿속에 맴돈다.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말이었는데
요즘 나에게 이 한 줄의 대사가 새롭게 다가온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끔 만드는 것일 거다.
이것을 확신한다.

괜찮은 사람이 사랑에 빠져서 더 좋은 사람이 된다면, 그 사랑은 건강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에 빠지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좋은 사람이 될 가능성만 품고 있는 사람들은
혹시 나의 사랑이 이런 나의 모습을 못 알아챌 수도 있으니까
미리미리 부지런히 좋은 사람이 되어 있어야 한다.

이 경우에는 의지가 필요한데,
이때는 더 좋은 사람과 건강한 사랑을 하고 싶다는 일념으로
열심히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고로 결론은,

사랑에 빠지건, 그렇지 않건 간에 
우리는 지금 더 좋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면 좋다는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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