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바르셀로나~  

 흥겨운 음악과 함께 영화는 시작된다. 마치 책을 펼치듯 나레이터가 나와 주인공 소개를 한다.


"비키와 크리스니나 둘은 대학시절부터 단짝이었고 기호가 같았으며 의견도 대게 일치했다.그러나 사랑문제에서는 어느 한구석 비슷한 곳이 없었다."

언제나 수다스럽고도 재치넘치는 영화를 선보이는 우디엘런의 흥미로운 영화가 개봉했다. 비키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 이해할 수 없는 제목으로 번역된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

귀엽고도 엉뚱한 주인공들을 잘 살펴보면 웃음이 베시시 터져나오다가도 어쩐지 몰입된다. 공감된다. 어쩐지 나같기도 하고, 이런 점은 나 닮기도 하고…둘다 나네?!





친절한 나레이터의 목소리를 빌려 인물을 분석해보자. 나는 어떤 유형에 속하는 사람인지 살펴보자.

"비키에게는 사랑의 고민이나 쟁취욕 같은 건 없었다.
굳건한 현실주의자였다. 남자에게 요구하는 건 진지함과 안정성이었다.

크리스티나는 전혀 다른 사랑을 기대했다.
깊은 열정에 따르는 고통을 지그시 받아들였으며, 위태로울 지경까지 그 감정을 밀고 나갔다.그런 고투 속에서 무엇을 얻었냐고 물으면, 입을 열지 못할 것이다 
뭘 바라고 한 일이 아니기에. 그것이 비키가 가장 우선시 하는 점이었다."

사랑에 관한 그 둘의 태도는 분명히 다르다. 이것은 그녀들의 삶의 태도와 비슷하다. 삶에 안정성을 추구하는 유형. 언제나 계획한 것이 그대로 이뤄져야 만족감을 느끼고, 자신과 주변에게 성실한 타입이 바로
비키다.

반면에 크리스티나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생동감을 가진 여자다. 때론 그 생동감이 지나쳐 위험한 모험에 전부를 걸게 하기도 한다. 늘 뜨겁고 약동하는 시간을 소유하지만, 안정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그녀에게 안정은 곧 따분한 감정을 일으키고, 그것은 그녀가 참아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모험과 방황은 크리스티나에게 단짝친구와 같은 것이다.





이러한 두 친구에게 열정적이고도 괴팍한 화가 후안 안토니오가 나타난다. 이 둘은 그에 의해 묘한 감정의 관계로 엮이게 되는데 그 방식도 큰 차이가 있다. 계획하지 못한 일에 닥치자, 비키는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우선 몸을 사린다. 하지만 혹시나가 역시나. 예상치못한 문제가 생기자 그야말로 혼란에 빠진다. 끊임없이 고민하고, 그럴수록 문제는 점점 진지하게 커져만 간다. 비키는 되돌려 고칠 수 없는 과거에 집착하고, 괴로워한다.




크리스티나는 어떤가. 새로운 환경에 정면으로 맞부딪친다. 같은 일이 크리스티나에겐 문제가 아닌 즐거움이 된다. 그녀는 예측하지 못한 일까지 일상으로 끌어안는다. 언제나 변화와 모험을 갈망했던 크리스티나는, 그런 상황을 꿈꾸기만 했지 스스로 만들어 낼 줄을 몰랐다. 늘 사건을 만들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후안 안토니오는 크리스티나에게 연인이자 갈망의 대상이다. 하나의 사건에 고여있는 비키와 달리, 크리스티나에게는 문제는 끊임없이 이동하고 움직인다. 결국 후안 안토니오의 전 부인 마리아 엘레나가 이르러 삼각관계에까지 이르게 된다.


마리아 엘레나! 그녀의 기질 역시 흥미롭다. 그녀는 심한 조울증을 갖고 있는 전형적인 예술가 스타일이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상황에 휩쓸리지 않는다. 그들의 기질이 상황을 휩쓸어버린다. 결코 짐작할 만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혼란 속에서 홀로 고요한 안정을 발견하기도 하고, 안정 속에서 폭풍 같은 감정의 고요를 일으키기도 한다.  





후안 안토니오, 마리아 엘레나, 그리고 크리스티나! 제멋대로 살아왔고 살아가는 세 사람은 서로에게서 공통점을 찾는다. 새로움에 대한 집착, 모험에 대한 갈망 등은 그들에게 있는 결핍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그들은 세 조각난 톱니바퀴가 맞춰지듯 서로의 관계 속에서 결핍된 것을 찾아낸다. 그리고 여타 영화 속에서 쉽게 마주치기 어려웠던 흥미로운 삼각관계를 형성한다. (그들의 캐릭터 자체가 흥미롭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불균형적이어서 오히려 이들에게 안정감을 주는 이 관계 역시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결국 또다른 결핍에 이끌려 관계의 삼각형을 깨고 부순다. 그리고 그래온 것처럼, 그들다운 제멋대로의 삶을 지속해간다.




현실주의적이고, 성실한 타입의 비키, 그녀에게 모험은 머나먼 하나의 이상과 다름없다. 크리스티나는 변화와 모험을 갈망하지만, 정작 스스로는 삶의 흐름을 만들어내지 못해 방황한다. 후안 안토니오도 자유롭고 주체적으로 보이나 알고보면 아내 마리아 엘레나의 세계 아래서 영향을 받고 있는 존재다.  

이들 중 가장 자유롭고 삶을 주체적으로 살고 있는 사람은 예술가 마리아 엘레나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어떤 억압과 욕망도 참아내지 않고 분출해버린다. 미술로서 분출하는 능력도 있고, 방법도 알고 있다. 그럼 마리아 엘레나 만이 행복한가? 과연 그런가? 분노를 이기지 못해 남편을 향해 총을 겨누고, 소리를 지르고, 자살 시도를 하는 그녀의 삶은 정녕 자유롭고 행복한가? 그것은 곰곰히 생각해볼 일이다.


비키의 현실순응적이고 안정을 추구하는 면모, 크리스티나의 열정과 갈망, 이것은 내 안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모습이다. 잘 들여다보자.
우리는 마리아 엘레나 같은 존재-자유로운 자-를 갈망하며 비키처럼 고민하고, 크리스티나처럼 방황하지 않는가?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를 보라. 내 안에 있던 비키와 크리스티나를 마주해보자. 아닌 척 모른 척해도 결국 그들의 모습 속에서 남몰래 키득댈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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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한복판에서 길을 묻다

역사학자 한홍구는 저서에서 지금 대한민국에 듫끓는 얽히고 섥힌 문제들을 몇가지 큰 주제로 정리하고 있다. 뉴라이트와 건국절논란, 간첩논란, 공사의 지대가 되어버린 강산, 민영화문제, 정국을 뒤흔드는 괴담, 사교육에서 지난 촛불의 의미까지- 한홍구는 꼼꼼하게 그리고 지금의 사회를 어지럽히는 문제를 족집게처럼 풀어, 특유의 시원시원하고 명쾌한 어투로 강의를 펼친다. 

 한홍구가 꼽은 대한민국의 문제들은 사실, 이미 여러번 한국의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되오던 것이다. 그러기에 그가 열거하고 있는 몇가지 주제들은 한국의 근현대사와 긴밀한 연관관계를 보이고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단순히 현재의 문제를 진단하는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과연 그 고질병이 어디서 기원하였는가, 근현대사적 지식과 역사를 통해 심도있는 분석 및 대안을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현대사를 관통하는 대부분의 문제들은 '그때 해야할 일을 미처 다 처리하지 못한' 데에서 기원하고 있다. 한홍구가 전작에 걸쳐 가장 목소리높여 꼽는 가장 중요한 문제는 지난 과거에 친일파 청산을 하지 못한 점이다. 현재 사회를 뚜렷히 나누고 있는 (극단적인) 진보/보수의 문제도 여기서부터 기원한다.

어느 나라나 진보와 보수가 있기 마련이지만 미국의 개입으로 인해 청산되어야 할 친일파들이 친미극우로 달라붙으면서, 거기서 대통령을 비롯 정치적 실세가 이어져오면서 사상적 대립의 골이 깊어진 것이다. 친일파 청산 실패와 더불어 한 궤를 이루고 있는 문제는 남북이 갈라지고, 이때까지 분단된 정국으로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특수적 현실이다. 진보주의자가 좌빨, 빨갱이라는 언어에 포섭되어 그야말로 보수/진보의 개념은 자의적으로 해석되기에 이른다. 치우친 언사를 자랑하면서도, 아직도 자신이 중도 혹은 진보적이라고 착각하는 매체나 인사들의 기원 역시 이쯤에서 찾아볼 수 있겠다. 

 친일파들이 잡게 된 전쟁 이후의 한국정치는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는 그들의 안간힘과 순전히 개인적 이익만을 위한 정치적 행보로 한국사회 고질병을 유발하기에 이른다. 진보쪽 인사들을 껏하면 "너 빨갱이지?"식으로 몰아붙여 남아나지 않을 정도로 처단하고, 강남 땅을 그때부터 일구기 시작했으며, 헌법은 콧방귀로 날리고 간첩 등을 운운하며 괴담을 양산하기에 이른다. 

잠시 생각해보자. 위 단락은 전쟁 초기 친일파들의 정치행보를 요약한 것인데, 어쩐지 쓰면서도 낯설지 않는 정국이다. 가끔씩 잊혀질만하면 등장하는 (의심스러운) 간첩소식, 무턱대고 DDOS의 배후를 북한으로 짚어버리는 난감한 정부, 남아나지 않을정도로 토목공사질을 일삼는 현정국, 쉴새없이 교체되고 일렁이는 사회 괴담까지- 올해들어 참 많이 들은 관용구(?), 역사후퇴의 증거들을 하나하나 확인하게 되는 안타까운 순간이다.  

민주화정부라고 불렸던 김대중, 노무현 정권 '역시' 다른 정권과 마찬가지로 불명예스러운 일, 안타까운 일을 많이 겪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정부가 의의가 있는 것은, 적어도 이제까지 한국사회의 문제를 인식하고 그것이 민주적으로 해결, 발전되는 방향으로 노력해왔다는 것이다. 과거청산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인혁당사건이 무죄로 판명되었고,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나름의 노력으로 그동안의 정국에 비해 한걸음 나아갔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한다. 

헌데 그 모든 것들이 다시 한걸음 물러섰다. 인권위원장은 사퇴하기에 이르렀고, 정권 교체후 뉴스에서 과거청산위 소식이나, 인권위 등의 (좋은의미의) 소식은 들은 바가 없다. 게다가 건국절 논란으로 지금의 헌법을 완전히 부정하려는 시도까지 서슴치 않는다. 놀라운 일이 아닌가. 한 순간에 모든 것이 그때와 같아지거나 더한 상태다.   

이 책에는 우리가 그저 문제라고 생각했던 문제가 실제론 어떤 모양이고 그 심각성은 얼마나 큰지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곳곳에 놀랍고 어처구니 없는 일 투성이지만, 여기서 감탄만 하고 넘어갈 일이 아니다. 한홍구는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어찌되었건 정권은 다시 바뀌게 되어있다. 우리가 현재 한국사회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해야 우리의 할 일을 알 것이다. 문제의 원인을 알아야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얘기해도 얘기해도 들어주지 않는 국민의 목소리가 괴담까지 이르는 현 상황을 정부가 하루빨리 인식하고 부디 자만을 내려놓고 겸손해져야하는 것이 첫째라지만, 우리가 그것을 지켜만 볼 일이 아니다. 진정한 민주주의를 꿈꾸기 위해서는 분명 국민된 우리에게도 할 일이 있다. 이 책이 그 모색할 동기가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책이 의미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알고 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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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들어 본
서른 편 가량의 영화를 천천히 생각해보았다. 많은 영화들이 이미지가 되어 머리를 스쳤다. 한 장면 한 장면이 영화 컷처럼 넘어가는데, 유독 한 영화의 잔상이 오래 남았다. 

 바로, <시계태엽오렌지>다.   






굳이 방금 순간이 아니더라도, 이 영화는 보고 난 이후 문득문득 내게 하나의 이미지가 되어 떠오르곤 했다. 분명히 다른 영화였다. 내 기억속에서도 꽤 오래 정착해있는 걸 보니, 그만큼 충격적이었고, 그만큼 인상적인 영화였다. 

 가장 먼저 알게 된 것은 '영화의 이해' 수업 시간이었다. 교수님은 고심하며 말씀하셨다. 함께 보고 싶은 영화가 있는데, 이걸 수업시간에 틀어도 될지 모르겠다며, 좀더 생각해보겠다고 하셨더랬다. 그리고 결국 선정성의 이유로 관람은 무산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 말씀이 기억에 남았다. "이 영화를 꼭 너희들과 함께 보고 싶었다"는 말.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태엽오랜지>는 문학으로 따지면 고전으로 칠 법한 영화다. 당시에도 충격적인 영상으로 런던에서도 상영금지처분을 받는 등 화제가 되었고, 미래를 예견하는 줄거리나, 독특한 화면구성, 편집 등이 무척이나 흥미로운 영화다. 즉, 필독도서마냥 필수관람해야 하는 영화 리스트로 오래 품고 있었던 영화란 것이다. 

허나 DVD 위에 그려진 말콤 맥도웰의, 익살맞지 못해 괴기스럽기까지한 미소는 선뜻 영화와의 만남을 허락치 않았다. 어쩐지 그랬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나름 영화 볼 수 있는 최적의 준비를 갖추고 이 영화를 만났다.  







영화 관련 서적에서 매번 수록되어 있는 첫 장면 이미지. 음란한 밀크바에 앉아, 반쪽만 긴 눈썹을 붙인 채 카메라를 응시하는 말콤 멕도웰의 모습. 아직도 생생하다. 이 영화에서는 특히나 장면 장면의 이미지가 강렬하고 굉장히 세련되었다. 소품이나 배경 하나하나 신경쓴 흔적이 역력하다. 

미래의 런던을 상징하는 심플하고 모던한 집 디자인, 의상들의 기이한 디자인(낯설지만 점차 익숙해지는), 강렬한 원색- 영화 속 단순하고도 강렬한 이미지들은 알렉스와 그 친구들의 어긋난 행동을 더 부각시킨다. 이들은 파괴자고 혼란을 일으키는 자들이다.  

어찌보면, 현대 런던은 모던을 상징하고, 폭력과 파괴를 일삼는 알렉스와 친구들의 행동은 참으로 구식처럼 느껴진다. 그러므로 이들의 행동은 용납될 수가 없다. 미래, 현대의 사회는 이들 조차도 심플하고, 깔끔하게 통제하고자 한다. 현대가 원시적인 것을 다룰 때 주로 쓰는 무기는 과학이다. 발달된 과학은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개인의 성향 마저도 변화시킬 수 있다.   







이 영화는 다양한 문제를 던져주는 영화다. 이를테면, 과연 과학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과연 인간의 본성, 성향 (소위 신의 영역)까지 침범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이것이 결코 허황된 상상이 아니라는 것은 현재의 한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약물이나 신경치료를 넘어서 이제는 유전자를 통해 '타고난 것'까지 조작해보려는 지금의 시도는 스탠리큐브릭 상상력의 분명한 연장선상에 놓여있는 것이다.   

그보다도 내게 흥미롭게 다가온 것은 바로 이 영화가 폭력성을 드러내는 방식에 있다. 내가 갑자기 이 영화에 대해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당시 메모해 둔 이 한 문장 때문이었다.  

" 나 역시 화면 속에 보이는 폭력과 선정적인 것들에 쾌감을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영화에서 폭력성은 쾌감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다. 알렉스는 이유없이 범죄를 저지른다. 그는 마치 그것들을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알렉스가 저지르는 대부분의 폭력, 혹은 상징이 성적인 것과 연관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가장 본질적인 쾌락을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서서히 관객들을 자극한다.  

첫 장면부터 난무하는 폭력성에 누구든 불쾌한 감정을 갖게 될 것이다. 하지만 너무나 빈번히 자주 보여주는 폭력의 모습에 점차 관객의 자극은 익숙해져간다. 불쾌감의 정도는 낮아지고, 온전히 하나의 자극이 된다. 폭력이 폭력이라는 불편한 이름을 버리고 온전히 그 행위 자체로 받아들여지게 한다. 그야말로 폭력을 응시하게 되는 것이다.  








이유없이 저지르는 숱한 폭력들을 지켜보라. 쾌감의 자극과 비슷한 자극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유있이 저지르는 응징은 합당하고 통쾌하게 생각한다. 그것은 다만 폭력 행사에 도덕적 면죄부를 주기 때문이 아닐까? 사람의 내면에는 폭력이 본능처럼 잠재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교육이나 사회화에 의해 절제된 폭력성 말이다. 때문에 끊임없이 이 시대에도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것들이 난무하는게 아닐까.  

폭력적인 사회에서 폭력성을 잃어버린 다는 것은, 심각한 약자가 되는 일이다. 교화된 알렉스는 늑대의 사회에서 양이 되어 버린다. 폭력적인 것만 보면 구토와 경기를 일으키는 '치료'를 받은 알렉스는 보복의 이름으로 정당하게(?) 쏟아지는 폭력 앞에 그저 당할 수 밖에 없다. 

이전의 악한 알렉스에게 당했던 피해자들을 보자. 그들은 선량했기 때문에, 폭력적이지 않기 때문에 당한 것일까? 감옥에서 알렉스가 나오자, 이전에 그에게 당했던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보복을 가한다. 그때의 표정을 보라. 그들은 하나같이 알렉스의 고통을 즐기며 끔찍한  미소를 지어댄다. 그들은 모두 이전의 악한 알렉스의 모습과 다름이 없다. 그저 내면의 폭력성이 잘 교육되었는가, 절제되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차이일 뿐이다.   







원시적인 폭력성을 휘두르는 알렉스는 처벌을 받고, 치료를 받는다. 허나, 나름의 이유있이, 사연있이 저지르는 그들의 폭력은 합당성을 띠게 되고, 법 안에서 수용이 된다. 심지어 알렉스가 가장 싫어하는 음악을 틀어놓고 자살을 유도하는 등 고문에 가까운 폭력성을 내비치는데도, 그들은 이유와 목적-실험이라든지 보복이라든지-을 지녔으므로 떳떳하게 자행된다. 그런 폭력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신분은 경찰과 박사 등 고위 관리직이다. 

요즘의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폭력을 살펴보자. 아홉시 뉴스, 사회면에 나올법한 범죄들은 요란하고 어지러운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것들은 사회 안에서 재단되고 응징된다. 이런 알렉스적인 폭력도 두려운 일이지만, 사회라는 틀 내에서, 그 틀에 딱 맞게, 혹은 틀을 이용해서 저지르는 폭력성도 못지않게 끔찍한 일이다. 정치가, 법조인, 방송인 등 소위 배운 사람, 아는 사람이 저지르는 폭력들. 더 잘 알기 때문에 더 치명적으로 괴롭히는 폭력들의 경각심을 일깨운다.  

폭력은 무조건 나쁘다.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향해 자행되는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폭력을 응시하는 영화<시계태엽오렌지>는 이때문에라도 의미있고,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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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소설의 강점은 상상력과 뻔뻔스러울 정도로 시치미 떼는 환상성이 아닐까. 나는 일본소설을 그닥 즐기지 않는다. 일본문체의 특징인지, 번역 때문인지 좋게 말하면 담백하고 군더더기 없는 문장이 내겐 늘 심심하게만 다가온다. 허세스러운 수식어 문장, 어려운 문장도 질색이지만, 분명히 아름다운 문체는 너무나도 큰 읽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내가 꼽는 아름다운 문장은 단연 김연수의 문장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줄기차게 읽어대는 유일한 일본소설이 있으니, 그것은 전부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이다. 그의 소설을 처음 접한 것이 바로 이- 제목도 단번에 알 수 없는- 용의자 X의 헌신이다. (제목은 읽고나면 이해할 수 있다. 말 그대로... 용의자...X의... 헌신) 
히가시고의 책을 좋아하는 까닭은, 재미있는 이야기, 놀랍도록 풍부한 그의 지식과 관심사 등등도 있지만 무엇보다 언제나 휴머니즘적이고 따뜻한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추리소설 작가가!! 사람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담겨있는 그의 소설은 어떤 이야기든지 좋다. 그리고 늘 어떤 이야기든지 놀라울 정도로 재미있게 써낸다.   



*이 소설을 읽었을 때의 충격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다. 내가 아는 추리 소설 중에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였고, 놀라운 추리와 전개였다. 너무나 책을 재미있게 읽었던 탓에 영화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이미 여러편 나온 히가시노 원작의 영화들이 절반의 성공, 절반의 실패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헌데, 이 영화.  



*잘 만들었다. 책을 봐도 내용을 알아도 재미있다. 심지어는 한번 보고 또 보고싶다. 책 내용을 잊었을 만큼 오래되기도 했지만, 그때의 충격과 감상이 고스란히 다시 떠오른다. 역시 굉장하다. 무엇보다 캐스팅이 훌륭하다. 유카와 역의 후쿠야마 마사히루도 훈훈한 외모로 스크린을 빛내주지만, 단연 이시가미 역의 츠츠미 신이치의 열연이 돋보인다. 히키코모리같은 캐릭터의 이시가미가 영화속에서 분명히 매력을 갖고 있을 때, 관객의 편으로 만들었을 때 모든 사건과 결말이 합당할 수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매력있다.  










*문제를 내는 천재 수학자와 문제를 푸는 천재 물리학자의 대결. 이 설정만으로도 흥미롭다. 이 영화는 뿐만 아니라 수학과 과학이라는 이성의 영역과 사랑이라는 감성의 영역을 치밀하게 대결시켜놓은 영화이기도 하다. 과연 사랑을 정의할 수 있을까. 풀수 있을까. 이제껏 숫자과 논리로 점철되었던 두 남자는 사건을 통해 사랑이라는 미스터리한 사건을 풀어보고자 한다. 






* 단순히 추리 사건을 푸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히가시노는 문제를 내는 사람을 등장시켜 더 치밀한 갈등상황을 유발한다. 물론 거기에는 탄탄한 논리가 뒷받침되니까 가능한 일이지만. 게다가 고정관념을 이용해, 누구나 쉽게 빠질 수 있는 함정으로 사건을 만들어 낸다.
기하문제인듯 보이지만 함수 문제인 것- 관객들 역시 모두 기하문제를 상상하다가 통쾌한 반전에 놀라게 되는 것이다. 

* 이 영화가 인상적이었던 것은, 영화를 보고 나서 "대체 사랑이 뭘까"라는 질문을- 천재 물리학자 유카와와 같은 질문을 읇조리게 한 점이다. 용의자 X의 처절한 헌신 뿐 아니라 각 인물들 주변에 포진해있는 그 사랑의 정체는 무엇일까. 정말 궁금해지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삶의 한줄기 희망같은 그 사랑이, 그 사람이 이해되는 것이다.   


* 책을 다시 읽어야 겠다.  

* 그 훌륭한 두뇌를, 이런데 쓸 수밖에 없었다니.  

 늘 뉴스를 보며 드는 그 생각. 여러 사람에게 해주고 싶었던 그 말, 정말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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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극장이었다. 오전부터의 일정으로 피곤했고, 그날은 영화 <더 폴>이 상영하는 마지막 날이었다. 포스터는 전혀 끌리지 않지만, 입소문 자자한 영상을 직접 확인하고 싶은 호기심 + 이런 영화는 영화관에서 봐줘야 한다는 당위성(4년간 28개국에서 촬영했다는데...) + 어쩐지 내일 되면 아쉬울 것 같은 마음때문에 입장했다. 

더 폴, 오디어스와 그 환상의 문으로. 

 


 * <더 폴>은 스토리텔러 로이와 그 이야기를 듣는 소녀 알렉산드리아가 만들어내는 판타지다. 로이는 알렉산드리아를 이용하기 위해 거짓 이야기를 지어내지만, 소녀는 그 이야기를 실제로 꿈꾸고 믿어버린다. 어린 소녀는 거짓말 까지도 마법으로 만들어내고 그 이야기는 현실이 된다. 현실과 판타지를 넘나드는 이야기 구조는, 영상만큼이나 환상적이다.   



* 만만한 판타지 영화가 아니다. 이야기 하는 자의 권력과 듣고자 하는자의 욕망이 첨예하게 담겨져 있고, 그 사이에 환상을 지키려는 자와 현실을 깨우려는 자의 갈등이 면면이 담겨져 있다. 알렉산드리아가 로이의 거짓말을 믿을 수록 로이의 갈등은 커지고, 로이가 알렉산드리아의 판타지를 깨뜨릴수록 소녀의 갈등이 커진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환상적인 동화같은 영화를 촬영하기 위해, 가능한한 현실과 같은 환경에서 촬영을 했단다. 즉, 한번도 연기경험이 없고 때묻지 않은 실제 꼬마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하고, 영화속 설정을 소녀와 배우들이 정말 믿도록 설정해두었단다. 촬영기간동안 다른 배우와 스탭들은 정말 로이가 영화속에서처럼 불구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단다. 그런 믿음과 리얼리티가 있었기에 더욱 환상적인 영화가 나올 수 있었겠지!  

*이 영화는 백번 말하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  







*클로즈업한 사람의 얼굴. 페이드 아웃되면서 사막의 풍경이 그려진다. 사람의 얼굴이 고스란히 사막의 풍경으로 겹쳐지는 마술같은 영상. 탄성을 질렀다. 결코 잊지 못할 장면이다.  

*로이의 모험담은 유치하기 짝이 없다.  악당 오디어스를 향한 다섯 영웅의 복수. 오디어스의 노예, 오디어스 때문에 소중한 나비를 잃은 천재 찰스 다윈, 오디어스 때문에 누명을 쓴 폭파전문가 루이지... 사연을 가진 영웅들이 복수를 향해 모험을 떠난다. 그 복수극은 때론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유치하기도 하고, 달콤한 로맨스를 그려내기도 하고, 만화 같은 장면들을 만들기도 한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이야기의 결말이다. 이야기 하는 자, 루이는 자신의 절망 때문에 모든 이야기를 헝클어뜨리고자 한다. 그것은 현실적이고, 어른다운 결말이다. 그들은 하나씩 죽어가고 실패와 절망에 가까워진다. 듣는 자, 알렉산드리아는 결코 그 세계를 무너뜨리고 싶지 않다. 그 환상에 뛰어들어 어떻게서든 루이를 막고자 한다. 환상을 지키려는 소녀의 몸부림이 어찌나 간절하고, 애절한지 정말 눈물이 핑돌 지경이었다. 이야기는 하나의 세계다. 누군가에겐 하나의 세계다. "제발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라며 달려드는 알렉산드리아. 그녀의 진심이 이야기를 지켜낼 수 있을까. 나 역시 결말에 치달아 갈수록 발을 동동 구르면서 보았다. 어서 뒷이야기를 알려달라고 조르는 알렉산드리아처럼.

 




 

* 나 역시 이야기를 믿고, 사랑하는 사람중 하나다. 난 언제나 이야기를 이야기하는 이야기가 좋다. 그 이야기는 언제나 내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렇게 알렉산드리아가 사랑스러웠나보다. 나에게도 언젠가 그럴 때가 오리라. 내가 만든 세계와 현실세계가 부딪치게 되는 그 때. 


  

그때 과연 알렉산드리아처럼 나도 온몸을 던져 내 세계를 구해낼 수 있을까. 끝까지 저버리지 않을 수 있을까. 이 이야기는 희망보다는 절망에 가까운 영화지만 나에게는 이런 이야기 자체가 희망처럼 다가왔다. 이야기라는 거대한 세계를 만난, 내가 갖고 있는, 만들어 나가는 한 세계를 확인받을 수 있었던 희망. 그래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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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내가 글을 다시 쓰게 된다면,
  그때 가장 먼저 쓰고 싶은 글은 바로 이 영화 <레볼루셔너리 로드>에 관한 것이었다. 영화를 본지 한달 가까이 되었고, 그 사이에 많은 영화들이 내 눈과 마음을 비추고 지나갔지만, <레볼루셔너리 로드>를 보던 그 밤과 그때의 느낌만큼 강렬하지도, 오래 남아있지도 않았다. 

* 다시 글을 쓰는 일은 쉽지 않았다.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임을 알면서도 한 달 가까이 글을 쓰지 않았다. 아니, 글은 쓰고 있었다. 늘 한가지 고민에 관한 글이었다. 끝도 없는 끝을 향해 돌고 돌고 도는 그 글. 오늘 업무 보고와 선택에 대한 고민을 줄줄 써내려가는 동안 이미 나는 글쓰는 일에 지쳐있었는지도 모른다. 






*
케이트 윈슬렛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재결합은 너무도 반가운 소식이었다. <타이타닉> 이후 각자의 필모그래피를 쌓으며 성숙해진 모습으로 다시 만난 두 사람이라니. 당시 한없이 우월했던 레오는 이제 버젓한 중년의 아저씨가 다 되었고, 케이트는 좋은 영화를 거쳐오며 우아한 중년 여성이 되어 있었다.(그녀는 나이를 먹어갈 수록 더 멋진 매력을 뿜어내는 굉장한 여배우다!) 아 알흠다운 광경이여. 그 두 사람, (비록 그 영화에서 사랑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마냥 이런 설렘뿐이다.) 만약 결혼 했다면 잘 살았을까.  


*
샘 맨더슨의 전작이자 화제작 <아메리칸 뷰티>를 본 기억이 난다. 평범한 중산층 가정 속에 천착되어 있는 욕망과 희망과 절망을 첨예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아버지와 친구 딸아이의 성적 판타지, 게이 등의 소재로 상당히 센세이셔널하고, 충격적인 영화였다. 평온한 일상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긴장감. 샘 맨더슨이 명민하게 포착하는 일상의 지점이다. <레볼루셔너리 로드> 역시 평범한 가정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시한폭탄 같은 긴장감이 상시 도사리고 있다.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꿈에 관한 영화다.
꿈? 여기서 말하는 꿈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꿈에 대해 생각했다. 그것은 희망과 비슷한 맥락의 언어다. 판타지와 상상력으로 구성되어 있고 설렘을 동반한다. 주술성도 갖고 있는 마법의 단어다. 어찌보면 꿈을 갖는다는 것은 사랑에 빠지는 일과 비슷하다. 평범한 것이 다르게 보이고, 무표정한 얼굴에 웃음을 자아내니까 말이다. 꿈은 그런거다. 남북통일이나 세계평화가 비전일 수는 있어도 꿈이 될 수는 없다. 꿈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자기 중심에서 부터 시작하고, 나로부터 이뤄지거나 무너지는 것이다. 환상으로 시작해 현실로 종결되는 문제다.  


* 왜 사는가? 왜 공부를 하고 왜 돈을 벌고자 하는가?
행복해지고 싶은 꿈이 있어서이다. 단지 자본주의 세계 속에서 당장 손앞에 떨어진 일만 쫓다 보니 목적이 상실되고 수단이 목적으로 전도되었을 뿐. 프랭크와 에이프릴의 꿈은 파리로 가는 거다. 왜냐하면, 이전부터 꿈꿨던 그곳에 가면 행복할 것 같기 때문이다. 아니, 꿈꾸던 그곳에 가는 것 자체가 행복이기 때문이다. 


*첫사랑의 설렘과 결혼후의 권태까지,
 교차편집으로 드러나는 그들의 감정과 삶은 그야말로 찬물과 더운 물처럼 극을 달리한다. 첫 사랑의 열정은 어디로 갔는가. 처음 이사 올 때의 흥분과 설렘은 어느 곳에 있는가. 배우가 되고 싶었지만, 좌절해버린 에이프릴. 한결같은 복장으로 한결같은 출근길에 지루함을 느끼는 프랭크의 삶은, 많지 않은 내 삶과 시간과도 무척이나 겹쳐져 있다.  

 





* 특히나 프랭크의 출근길. 매일 빨간 장거리 버스 안에 몸을 구겨넣어 차 문에 빈대떡처럼 달라 붙어 고
속도로를 달리는 내 모습과 절로 겹쳐진다. 버스 안에서 보는 버스 안 풍경이 떠오른다. 모두가 같은 양복을 입고, 같은 크기의 사각 가방을 들고 같은 자세로 좁은 버스 안에 끼어있는 아저씨들. 창 밖에서 차 문에 붙은 내 모습을 바라보는 공허한 시선들. 다들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고 있을까. 의문이 들게끔 한 방향으로 모두 달리는 차들.    


* 싸우는 것에도 지쳐버린 젊은 부부.
에이프릴은 문득 자신의 그런 상태를 깨닫는다. 그리고 다행히도 이전의 삶의 열정을 떠올려낸다. 좋았던 시절. 에이프릴의 잘못을 하나하나 꼬집어대기 전의 프랭크는 "삶을 진정으로 느껴보고 싶다. 파리에 가고싶다"고 말했었다. 에이프릴은 용기를 낸다. why not? 에이프릴은 자신의 삶에 진정한 레볼루셔너리 로드를 내고자 한다. 


 *   

프랭크: 프랑스에 간다고 쳐. 그럼 거기서 내가 뭘 해?

에이프릴: 당신이 7년전에 했어야 하는 일을 하는거야. 당신의 시간을 갖는거야. 태어나서 처음으로 당신이 진짜로 원하는 것을 하는 거야. 그것을 찾아내면 그 일을 하면 돼.  

프랭크: 여보, 그건 현실적이지 못해 

에이프릴: 아냐 프랭크. 지금 상황이 비현실적이야. 건강한 마음을 가진 남자가 맞지도 않은 일을 하고 견디기 힘든 집으로 오고 견디기 힘든 아내와 있는게 비현실적인거야.   

우릴 봐, 모두 바보같은 착각에 빠져있어. 운명에 순응하고 애들이나 잘 키워야 된다는 착각. 그것때문에 서로를 힘들게 해. 

지금 당신 숨막히게 살고 있잖아. 당신 자신을 부정하며 그렇게 살고 있잖아. 모르겠어?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아름다워. 당신은 위대해. 이건 기회야 프랭크



 




* 두 사람에게 꿈이란 것이 생겼다.
일상은 꿈 앞에서 얼마나 가소로워지는가. 그들의 달라진 일상을 보라. 하지만 꿈은 풍선껌처럼 불기는 쉽지만, 키우고 간직하는 일은 쉽지가 않다. 그들은 금세 일상의 도전을 받는다. 과연 그들은 프랑스에 갈 수 있을 것인가.  


* 나 역시 간절히 프랑스를 꿈꾼다.
내가 프랑스에 가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직장이 있기 때문에? 프랑스에서의 삶이 막막하기 때문에? 그곳에 간다는 일이 정말이지 비현실이기 때문에? 나를 붙잡고 있는 수만가지 의심의 고리들이 이들 부부 역시 붙들어 놓는다. 샘 맨더슨의 영민함이 이러한 지점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영화라는 판타지 속에서 들어내는 삶의 기묘한 갈등, 긴장, 리얼리티를 포착해낼 줄 안다. 영화 속 주인공의 꿈이 내 꿈이 되는 순간, 관객은 영화에 빠져든다. 그들과 함께 꿈을 꾼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들이 부디 프랑스에 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 이들 부부 말고도 흥미로운 인물이 하나 나온다.
이웃 노부부의 아들 존이다. 정신병을 앓고 있는 존은 이들 부부의 프랑스행을 유일하게 응원하는 인물이다. 대게 영화의 화법이 그렇듯이 존은 이상한 인물처럼 그려져 있지만, 진실을 이야기한다. 삶과 부딪치며 겪는 그들의 선택들에 대해 진실 혹은 진심을 말해주는 인물이다. 그 때문에 존은 가장 큰 갈등으로 치닫는 빌미를 제공한다.  


* <아메리칸 뷰티>를 본다면,
 이 영화 역시 그야말로 샘 맨더슨적인 이야기, 그다운 말하기라는 것을 금방 눈치채리라.(너무나도 즐겁다. 그를 존경한다.) 결말 또한 평범한 가정에서 출발한 이야기 치고 무척이나 충격적이다. 파리가 중요한게 아니다. 그들의 꿈이 로드, 출발과 과정과 끝이 보는 이의 마음을, 꿈을 한없이 휘젓고 흔들어 놓는다.  


*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바로 이것이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꿈은 달콤하지 않다. 현실적이고 날카롭다. 자, 지금 네 모습을 봐. 모든 것이 네 선택이었어. 지금 이렇게 있는 것도, 앞으로 어떻게 되는것도 고스란히 네 몫이고 네 선택이라고. 맘에 안든다고? 불만이 있다고? 이것도 네가 꿈꾸고 바라고 선택한 일이라구! 


*  그래서 이제, 너는 어떻게 할건데.
검은 화면 위로 크레딧이 서서히 올라간다. 한참동안 눈을 떼지 못한 것은, 이제까지 이 영화를 맘 속에 품은 까닭은 아직 선택을 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용기를 내지 못한 까닭일까.  

 


*한가지 덧붙이자.
두 배우가 무척이나 탁월하게 연기를 했다는 진부한 감탄을 적지 않을 수 없다. 정말 최고였다. 갈등하는 소시민의 레오나르도는, 그동안 너무 무게잡아 드러나지 않았던 그의 진솔한 매력을 한껏 발산했고, 우아하지만 충분히 도발적인 케이트 윈슬렛은 <이터널 선샤인>의 캐릭터를 떠올리게 할만큼 매력적이었다. <더 리더>도 좋은 영화였지만, 케이트 윈슬렛은 이 영화로 상을 탔어야 했다. 케이트 윈슬렛이 시상식에서 상을 받으면서, "레오, 당신은 나에게 정말 특별한 사람이에요!"라며 사랑스러운 눈길을 보낼때, 괜히 흐뭇해지는 것은 무슨 심사일꼬. 이 커플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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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감독 산제이 릴라 반살리 (2005 / 인도)
출연 아미타브 밧찬, 라니 무커르지, 쉐나즈 파텔, 아예샤 카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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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버전 헬렌켈러다.
마치 <죽은시인의 사회>에서 걸어나온 듯한 혈기왕성한 사하이 선생님이 헬렌켈러인 미셸과 이루어내는 마법같은 이야기다.

예상대로 감동이 있고, 분명한 눈물점이 있다는 점이 큰 미덕이다. ('예상만큼'이라는 수식어는 결코 쉽게 붙일 수 없다는 걸 기억하자) 웬만해선 영화보고 눈물따윈 흘리지 않는 나도 미셸이 처음 선생님을 부를 땐 그만 안구에 촉촉한 습기를 느낄 수 있었다.

아마, 사하이 선생님이 미셸을 보고 울 때마다 함께 울게 될 것이다.

이런 기본 구조에 선생님과 제자 간의 미묘한 사랑 이야기가 헬렌켈러 스토리에 깊이를 더한다. 미셸의 흔들리는 내면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으리. 사하이 선생님의 교육을 받고 있으면 금세 선생님의 매력과 열정에 빠져들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사제지간에 흐르는 모호한 감정도 긴장감있게 잘 살렸다.

사하이는 알츠하이머 병에 걸리고 미셸에 대한 기억을 잃어간다. (이건 예고편에도 나오는 설정이다..)
사랑은 비록 이루어지지 않지만, 미셸과 사하이가 스승-제자 관계에서 제자- 스승의 관계로,
서로의 역할을 바꾸어 서로의 존재의 의미를 획득해과는 과정이 무척 인상적이다.
어느정도 억지스러운 부분이 있지만, 그 과정은 분명 목이 메이게 하는 감동을 갖고 있다.


이 영화는 헐리우드 영화처럼 잘 짜여져 있다.
하지만 발리우드 식으로 풀어냈으면 어떨까?
정밀하게 다듬어진 감동을 만나는 것도 재미있지만, 군데군데 할리우드적인 공식에 맞춰 진행되는 이야기는 긴장감을 떨어뜨린다. 발리우드 식으로, 조금은 거칠고 황당하더라도 더 자유롭게 이야기를 풀어냈다면, 더 생생하게 살아있는 미셸과 사하이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분명 감동은 있었지만, 조금은 심심하다고 느낀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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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 A
감독 존 크로울리 (2007 / 영국)
출연 피터 뮬란, 앤드류 가필드, 알피 오웬, 케이티 라이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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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본 영화중 가장 인상적이었다.


소년은 14년간의 복역을 마치고 ‘잭’ 이란 새로운 이름으로, 오래도록 단절되었던 진짜 세상에 뛰어들 준비를 한다. 그의 착한 본성을 알고 있던 보호감찰사 테리의 도움으로 새 직장과 친구, 애인까지 생기게 된 잭. 그러나 너무도 간절했던 것들을 손에 넣을수록 과거를 숨기고 있다는 죄책감은 더욱 깊어만 진다.

 그러던 어느 날, 교통사고현장에서 여자아이를 구한 잭은 일약 영웅으로 떠오르지만, 그와 동시에 보이 A의 석방소식이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감춰왔던 과거가 드러나게 된다. 잔혹한 과거 앞에 다정했던 사람들은 차갑게 돌변하고, 세상은 소년을 밀어내기만 하는데…



캐스팅과 연기에 일단 ★★★★★

소년 특유의 섬세한 내면과 자의식에서 비롯되는 갈등을 그야말로 '기똥차게' 표현해 낸 앤드류 가필드. 그의 얼굴 때문에 군데군데 마음이 아팠다. 새로운 인생을 사는 설레임과 자신의 진짜 이름을 속이고 살아가는 잭의 유약한 내면이 스크린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소년의 현재와 과거의 범죄 이야기가 교차편집되어 진행된다. 소년이 10년 전에 저질렀다는 끔찍한 범죄에 다가가는 과정의 긴장이 상당하다. 도대체 소년은 어떤 '끔찍한'일을 저질렀길래. 10년 후 지금의 '잭'에게 서서히 내 마음이 열려갈수록, 과거의 사건에 다가가는 두려움이 커져만 간다. 

넘치지도 모자르지도 않은 깔끔한 영상. 절제되고 세련된 편집에 마음을 뺏겼다. 정말 엄지손가락이 올라갈만큼 빼어난 화면이었다. 특히 종종 뿌옇게 드러나는 화면은 소년의 기억과 불안, 흔들리는 자의식, 불투명한 미래를 보여주는 듯  마음을 흔들어놓는다. 

지난 날 악마였던 이 소년에게 두 번의 기회란 없는가? 고립시키고 추방시킴으로써 두려움에 대처하는 방법 외에는 없는 것일까? 과연 이 범죄 소년들에게 감옥(고립)이 정말 도움이 되었는가? 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고립 그 이후에는 사회가 어떻게 돌봐줘야 할 것인가.


"너는 기억하지? 내가 소녀를 구해줬다는 것. 너는 그걸 기억하지?"

잭이 친구에게, 마치 나에게 호소하는 그 마지막 한마디가 오래토록 귓가에 남는다.
영화가 갑작스럽게 끝나고 영상 대신 어둠이 스크린을 덮는 순간, 칼로 베이는 듯한 생채끼를 느꼈다.


너는, 기억하지..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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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리틀 선샤인
감독 조나단 데이톤, 발레리 페리스 (2006 / 미국)
출연 그렉 키니어, 토니 콜렛, 스티브 카렐, 폴 다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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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리틀선샤인>은 괴짜가족의 로드무비이자 사랑스러운 코미디다. 2006 선댄스에 출품되어 화제가 되었고, 규모는 작지만 블록버스터급 감동으로 ‘마법 같은 영화’라는 호평이 쏟아졌다.

 

아버지 리처드는 성공이론을 설파하는 성공학 강사지만, 그의 인생은 성공이론에 접목시키지 못했다. 엄마 쉐릴은 누구보다 가정을 생각하고 위하면서도 매번 인스턴트 음식을 식탁위에 올려 식탁의 긴장감을 조성하기 일쑤다. 헤로인 복용으로 양로원에서 쫓겨난 할아버지 에드윈은 사돈에게 포르노잡지를 사달라고 하는 괴짜 노인이다. 그런가하면 아들 드웨인은 몇 개월째 침묵 수행으로 지필로만 대화하고 있고, 가끔 노트에 쓴다는 말도 “I hate everyone" 정도다. 뱃살이 볼록 나온 통통한 막내 올리브는 미인대회 우승을 꿈꾸며 그녀들의 행동을 흉내 낸다. 여기에 동성 애인에게 배신을 당해 자살시도 후 퇴원한 저명한 교수 삼촌 프랭크가 가세한다. 그야말로 이보다 더할 수 없다 싶을 정도로 대책 없는 가족구성이다.

 

‘미스리틀 선샤인’이라는 어린이 미인대회에 올리브가 참가하게 되면서, 후버가족의 여정이 시작된다. 누구도 인생의 패배자가 되길 원치 않지만, 그들이 여행길에서 겪는 악재와 불운은 그들을 금새 주저앉게 만들고 만다. 시종일관 덜컹거리던 낡은 버스는 급기야 멈춰선다. 고장 난 버스를 밀며, 작전을 방불케 하는 그들의 탑승 장면(포스터에 그려진 장면)은 이 영화에서 무척이나 상징적이다. 스스로 올라타야 하지만, 손 내밀었을 때 잡아주고 응원해줄 이가 있는 곳. 그 지점에 있는 가족을 보여준다. 그들의 화해와 위로는 결코 통속적이지 않다. 이 점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이다.



그들은 여행을 통해 자신의 존재가치를 깨닫게 된다. 자기가 이곳에, 이 사람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확신- 우리의 가족에게도 절실히 필요한 위로다. 이는 모든 관계가 성립하는 전제 조건이 되는 감정이다. 그들은 가족이 ‘계속할 수 있게 하는 에너지’라는 것을 알게 된다. 버스의 고장에도, 가족의 갈등 속에서도 계속 달리게 하는 동력, 올리브가 무대 위에서 끝까지 춤 출 수 있게 만드는 동력, 지긋지긋한 관계 속에서 달아나고 싶어도 결국 끝까지 함께 할 수 있는 동력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때문에 후버가족은 여전히 끊임없이 갈등하겠지만, 아마 서로를 포기하는 일만큼은 없을 것이다.

 

그들이 이러한 화해에 도달하기까지 큰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고, 대단한 노력이 필요한 일도 아니었다. 그저 서로 어디가 아픈지 알았을 뿐이고, 그곳에 손 한번 올려놓았을 뿐이고, 등 돌리지 않고 도망가지 않고 그저 함께 있었을 뿐이다. 루저들만 모인 후버 가족을 어느 누가 패자라고 말 할 수 있겠는가? 리처드가 목청껏 외치는 성공원칙이 고스란히 담겨있는데도 불구, 이 영화가 일신의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지만, 관계에 있어서만큼은 성공의 소중한 비밀을 짐작해볼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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